임인년 기획-제주 폐사지 연구 - “제주 폐사지 답사로 본 제주불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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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기획-제주 폐사지 연구 - “제주 폐사지 답사로 본 제주불교의 모습”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2.01.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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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제주대 사학과 교수팀이 도내 폐사지 답사
조사 분석한 내용 중심으로 중세 제주불교사 재정립

제주에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었는가는 제주불자들에게는 늘 궁금한 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이형상 목사가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후 2백년 무불시대를 지나 안봉려관 스님의 근대불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면서 근대 제주불교의 모습이 어느정도 드러났다. 하지만 그 이전의 제주불교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우리 불자들에겐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존자암지와 수정사지 등 몇몇 폐사지 발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다른 지역의 폐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지속되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제주불교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가 요원한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시골 밭담 사이로 기와 파편들이 드러나 보이고 있다는데 그대로 남의 이야기처럼 보고만 있다면 제주불교의 정체성은 대체 누가 찾고 세울 것인가. 단순한 궁금증에 이어서 쏟아져 나오는 질문들이다. 
이에 본지는 임인년 새해 특별기획으로 무불시대이전의 제주불교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데 초점을 맞췄다. 올 한 해 동안 제주대학교 사학과 전영준 교수(탐라문화연구원)팀이 제주 폐사지 발굴과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제주불교의 정체성을 밝혀내는데 주력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제주불자들에게 제주불교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제주 불교의 위상을 재정립하는데 힘을 모아볼 생각이다.

 

전영준 교수의 제주 폐사지 답사 ①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

 

1.  고려시대 제주 불교의 위상을 찾아서

고려~조선시기 제주목을 중심으로 대정현과 정의현 간의 주요 간선로는 3읍간의 행정업무를 위한 긴급 교통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유배인, 군사 및 물자 등의 이동 등에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제주목에서 동부지역의 정의현과 연결되는 간선로에는 관원을 비롯하여 왕래하는 이들의 行旅를 돕기 위한 관청이나 시설이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고, 보문사지는 그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제주도의 普門寺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며, 수정사‧법화사‧원당사‧묘련사‧서천암‧보문사‧산방굴사‧존자암‧월계사‧문수사‧해륜사‧만수사‧강림사‧소림사‧관음사의 15처가 확인된다. 보문사지는 이후 1653년 이원진의 '耽羅志'에도 총 22개의 사찰과 함께 기록되어 있지만, 기능이나 역할 등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제주에 ‘당(堂) 오백, 절 오백’이라 구전되는 표현에 대해서도 확실한 고증이 어렵고,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역사회에 끼쳤을 제주 사찰의 독특한 위상과 역할도 규명할 수 없다. 이것은 결국 한국중세시기 탐라 및 제주의 발전과정에 일정한 기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제주 불교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사찰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여말선초 시기 및 조선시대에 제주 불교가 지녔던 위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여, 향후 폐사지의 발굴이나 복원 등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초적인 단서를 제공하는데 있다. 그리고 고려~조선 시기에 제주에 존재하였던 사찰에 대한 순차적인 검증과 함께 깊은 이해를 추구한다면 탐라에서 제주로 이행하는 시기의 제주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을 자세히 논구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보문사지는 창건 이후부터 조선후기까지 관원은 물론 제주목에서 동부지역의 정의현으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로 상에 위치하여 관원은 물론 行旅의 편의를 돕는 ‘院’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우선적인 검토를 진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문사지에 대한 正史類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록들을 우선 검토하면서 고지도에 대한 탐색과 수차례에 걸친 현장답사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조선시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어골문 계통의 기와는 물론 격자문 및 일휘문 암막새를 포함하여 상당량의 청자 및 백자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보문사지의 지리적 위치와 특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제주 중산간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자리하였던 이유와 주요 간선로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숙고할 수 있었다. 
보문사지의 사역은 남양 홍씨 선산이 자리하는 꾀꼬리오름의 북사면으로, 현재에는 농장 및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은 민가를 포함하여 새롭게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어서 사역이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주에 전하는 옛 기록과 함께 구전되고 있는 보문사지에 대한 내용을 종합하여 빠른 시일 내에 보문사지와 주변의 발굴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2. 보문사지의 위치와 지형적 특징

조천읍 대흘리 산 33번지 일대의 보문사지는 교래리의 꾀꼬리오름(것구리오름) 북쪽에 있다. 폐사지라고 추정되는 곳의 남쪽으로는 현재 남양 홍씨의 선묘가 오름의 북사면에 있으며, 폐사지의 동측 도로가에 오름 표석이 있다. 표석 뒤 10여m 아래로 내려가면 ‘원물’이라 일컫는 샘물이 있는데, 4․3전에는 와산․대흘리 주민들이 이 샘을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에는 대흘 1리 사람들이 돌담을 둘리고 지붕을 만들어서 보존하고 있으나, 식수로는 이용이 불가능해 보였다. 대흘리는 조천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위쪽(남쪽)에 대흘1리, 아래쪽(북쪽)에 대흘2리가 있다.

(도 1) 1678년 이후부터 1700년 사이에 제작된 '耽羅圖'에 나타난닥낭곶[楮木藪] 普門村 臥乎山里 大仡村
(도 1) 1678년 이후부터 1700년 사이에 제작된 '耽羅圖'에 나타난닥낭곶[楮木藪] 普門村 臥乎山里 大仡村

대흘리의 옛 이름은 ‘한흘>한흘마을’[大仡, 大屹, 大訖>大訖村, 大屹村, 大仡里, 大屹里, 大訖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 제주목-佛宇」에 의하면, 보문사는 것구리오름[巨口里岳] 북쪽에 있다. 僧 慧日의 시에, “절이 궁벽하여 거친 변방에 의지하였는데 샘물이 단 것은 꿈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蓮場에 좋은 일을 만났고 佛法의 遺風을 잇는다.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고 담쟁이는 瘴氣로 인하여 붉어지지 않아, 圓通門은 스스로 열렸는데 먼 기러기가 긴 하늘에서 부르짖는다.” 하였다. 이로 보아 1481년(성종 12) 이전까지 보문사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혜일의 詩가 수록되어 전하는 것에서 바로 고려시대의 사찰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혜일은 1275년(충렬왕 1)부터 1308년(충렬왕 34) 사이에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문사는 충렬왕 1년 이전에 이미 운영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것이 金尙憲의 '남사록' 권1, 9월 21일에 나타난 地誌에 의하면, “제주에서 특유하게 나는 물건으로는 山稻․黍․稷․粟․菽․豆․蕎麥․麰․馬…厚朴은 ‘보문골’에서 나온다[出普門洞]”고 하였다. 이 보문골은 바로 보문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1678년 이후부터 1700년 사이에 제작된 「耽羅圖」에는 닥낭곶[楮木藪]․普門村․臥乎山里․大仡村이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1678년 이후부터 1700년 사이에는 보문촌과 대흘촌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 2) 1872년에 제작한 '濟州三邑全圖'와 '濟州地圖'에 나타난절세미[寺泉] 세미오름[泉岳] 濟衆院 二所場 大仡里
(도 2) 1872년에 제작한 '濟州三邑全圖'와 '濟州地圖'에 나타난절세미[寺泉] 세미오름[泉岳] 濟衆院 二所場 大仡里

그로부터 1765년(영조 41)에 편찬한 '增補耽羅誌' 권5 「濟州牧-面村 增」 ‘左面에는 小面이 4개로 新村面․朝天館面․金寧面․別防面이 있다. 특히 신촌면에는 新村․大訖․橋來․臥乎山 등 4개 마을[合四里]’이 있다. 이 당시의 제주목에 大面 4개에는 風憲 각 1인이 있다. 小面 12개에는 約正 각 1인이 있으며 81개 마을에는 마을마다 警民長․勸農․機察官․捕盜․尊位․洞長․里任․色掌․指審․有司가 각 1인이 있어 모두 서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1785년(정조 9) 2월 이후에 편찬한 '濟州邑誌' 「坊里-左面」에는 ‘한흘마을은 제주읍성으로부터 동남쪽 25리의 거리에 있다. 백성의 집[民戶]은 47호이고 남자는 135명이며 여자가 174명으로 남녀 합계가 309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1826년(순조 26)에 작성된 '減柴節目'에도 大屹마을로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당시에는 한자표기가 ‘大訖’에서 ‘大屹’로 바꾸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 1872년에 제작한 「濟州三邑全圖」와 「濟州地圖」에도 절세미[寺泉]․세미오름[泉岳]․濟衆院․二所場․大仡里가 표기되어 있다. 절세미[寺泉]는 보문사 터의 곁에 있었던 샘[泉]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이전에 제중원은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또는 정의현에서 제주목으로 오고가는 官人이나 또는 길손이 묵는 일종의 관영 숙박시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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