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진 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6) - 도덕경 - “有없는 無도 불가능하지만 無없이는 有도 존재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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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진 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6) - 도덕경 - “有없는 無도 불가능하지만 無없이는 有도 존재할 수 없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0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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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이 장은 무의 쓰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무는 자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다른 것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능하게 해준다.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유와 무의 두 축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유의 측면만을 강조한다. 노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무의 중요성에 집중하였다. 
서른 개의 바큇살은 바퀴통의 비어 있는 곡(轂)에 모여 수레의 쓰임이 있게 된다. 만약 그 빈 곳이 없게 되면 수레는 균형을 맞추기 힘들어 곧 부서진다. 
밀레니엄을 앞 둔 22년 전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노자와 21세기’라는 EBS 방송프로그램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11장을 설명한 부분이 너무도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는 서안의 병마용을 언급하면서 병마용에서 출토된 수레바퀴가 정확히 바퀴살이 30개라고 하였다. 필자도 그 시절 병마용을 갔다 왔는데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지독히 비싼 입장료와 찰흙으로 빚은 병마용이 사람 목숨보다 더 귀해 병마용을 도굴해서 팔다가 사형 당했다는 이야기, 진시황이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등등이었는데 철학자와 나와의 관심이 너무도 달랐던 것에 괜히 자책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튼 그는 서른 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곡에 맞추는 것은 가르쳐서 되는 경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부단히 숙련되었을 때 나오는 경지, 그것이 바로 도(道)의 경지인 것이다. 마치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달인처럼 눈을 감고도 오차없이 해내는 경지,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 썰 듯, 수 천번 수 만번 반복했을 때 다다를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도(道)인 것이다. 
찰흙을 이겨 옹기 그릇을 만들 때도 안이 비어있지 않으면 그릇 안에 음식이나 물건을 담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건물 또한 안이 비어서 문과 창이 있어야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이 없는 방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방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방에도 빈 공간이 있어야 눕기도 하고 움직임이 가능하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으면 창고밖에 될 수 없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일이나 공부를 함에도 적절이 쉬어주지 않으면 공부나 일을 오래 할 수가 없다. 이것이 쓸모없음의 쓸모이다. 그러므로 모양 있는 것이 쓸모가 있는 것은 모양 없는 것, 쓸모없는 것이 그 뒷받침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버리는 것이 없다 했던가? 나름의 역할을 제대로 알기에 적절하게 잘 운용하기 때문에 굳이 불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道)의 운용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인사기획을 하거나 나라를 경영하게 되면 그 회사나 그 나라는 큰 문제없이 저절로 다스려진다. 이는 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도(道)의 눈으로 통치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당시 유가나 묵가 등과 같은 많은 철학들이 여백으로 방치한 부분, 즉 무(無)의 부분을 중시했다. 그렇다고 무(無)가 유(有)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주시하지 못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니 무가 도드라졌을 뿐이다. 노자가 보기에 존재는 유와 무의 교차로 서로 대등한 대립면이다. 유 없는 무도 불가능하지만 무 없이는 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화 기법 중에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는 것이 있다. 직접 달을 그리지 않고 주변의 그림을 그려 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구르미 그린 달빛’이 바로 홍운탁월을 의미한다. 이 때 달은 없지만 구름으로 인하여 달은 드러난다. 무는 없지만 유로 인하여 무가 드러나고, 유는 무로 인하여 쓸모가 있게 된다. 노자는 이러한 대립면의 일치를 모르고 오로지 유약함을 배제한 강함만을, 밤을 배제한 낮만을, 여성을 배제한 남성을, 감성을 배제한 이성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한다. 
불가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공(空)을 말한다. 공(空)은 없음이 아니라 텅빈 충만을 의미한다. 침묵이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여백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듯이, 텅비어 있음은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 이러한 공(空)의 개념은 없었다. 그나마 흡사한 것이 노자의 무(無)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불교는 이러한 무(無)의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에 격의 불교화되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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