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교수의 제주 폐사지 답사 ② -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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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교수의 제주 폐사지 답사 ② -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08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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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은 동부산업도로를 따라 제주시 봉개동을 지나고 나서 다다르는 교래리 가는 길의 교차로 동남쪽 모퉁이에 슈퍼와 휴게음식점 및 민박을 겸한 ‘길섶나그네’라는 쉼터가 북쪽 길가에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주목으로부터 정의현으로 가는 사람들이 점심[中火]을 먹는 곳이었다. 이는 바로 1734년 이후 1754년 이전에 제작한 <제주삼읍도총지도>에 ‘普門’으로 표기되고 그 옆에는 ‘旌義員中和處’라는 注記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濟衆院이라고 명명하여 표기되고 있다. 특히 院은 주로 길을 오고가는 관인이나 또는 길손이 묵는 일종의 관영 숙박시설이었다. 국가에서는 원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院田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제주삼읍전도」와 「제주지도」에 ‘濟衆院’으로 표기되고 있다. 제중원의 경우에는 50m 남쪽에 ‘원물’이 있었으므로 쉽게 물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원골[院洞]이라 하였다.

또 1890년(고종 27)에 대흘 마을의 인구는 261명이었다. 그러다가 1899년에 제작한 <濟州郡邑誌>  「濟州地圖」에는 원골[院洞]․水口門․세미오름[泉味岳]․곱은달이[古分洞]․기시네오름[近思岳]․한흘마을[大屹里]로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1899년 당시에는 한흘마을[大屹里]과 곱은달이[古分洞]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곱은달이[古分洞]는 원동과 한흘마을[大屹里] 사이에 있다. 이곳이 바로 대흘 2리로서 옛 이름은 ‘곱은달이’이다. ‘곱은달이’는 구부러진 언덕이라는 뜻이며, ‘曲月洞’으로 표기한다.
1904년(광무 8)에 편찬한 <三郡戶口家間摠冊> 「新左面 9里」에 한흘마을[大屹]의 연기가 나는 집[煙家]은 119호이다. 남자 164명과 여자 193명을 합하여 357명이고 초가는 323칸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대흘리라 하였다. 1929년 한흘[大屹] 마을의 戶數는 163호이며 남자가 322명이고 여자는 331명으로 남녀 합계가 653명이었다. 1966년부터 옛 ‘한흘’[大屹] 일대를 ‘대흘 1리’라 하고, ‘곱은달이’ 일대를 ‘대흘 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20년 5월 현재 本洞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보문사지가 있는 꾀꼬리(것구리)오름은 해발 428m이며 절터는 해발 350m정도의 평탄한 대지에 위치한다. 이 오름 주위로는 대략 동-서-남-북으로 우전제비오름, 바농(바늘)오름, 민오름, 세미오름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 의하면, “普門寺在巨口里岳北”, “普門寺在川東三十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의 고승 혜일이 제주를 유력하면서 남긴 기록으로 보아도 보문사지 역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가장 절정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韓國寺刹全書>에서도 ‘在全羅南道濟州郡巨口里岳北 今廢’라고 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과 <梵宇攷>의 기록을 옮겨 확인하고 있다.

보문사지는 제주 북부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97번 지방도(번영로) 남측 지역인 해발 300~350m의 평탄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의 <도 5>의 지형도에서 교래와 조천으로 연결되는 남북교통로가 고려~조선시대에 제주목에서 교래-정의현으로의 이동에 활용되었던 동부지역의 간선로이다. 이 도로는 현재에도 차량 교행이 가능할 정도로 보문사지에서 교래 입구까지 평탄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이 도로의 서측이 보문사지다. 
<도 5>에서 표현되고 있는 지방도 97번과 1118번이 근래에 조성된 도로임을 감안하면 고려 및 조선시기에 제주성에서 정의현으로 가는 주요 간선로는 제주성 동문—화북—삼양—조천—함덕—와산—보문사지—교래(정의)로 이어지는 교통로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보문사지와 가까운 곳에는 교래에서 조천 및 함덕의 남북으로 이어지는 건천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제주 하천은 雨期에만 기능하는 乾川으로 과거에는 이들 하천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정표로 삼았다. 그리고 하루 정도의 이동을 감안할 때에도 보문사지는 제주에서 동부지역으로 이동하는 노선상의 기착지와 휴식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도 제주를 관할하는 중요한 행정체제간의 연결은 교통로의 확보를 통한 물자의 원활한 운송 및 관원의 이동을 담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산남[서귀]과 산북[제주]을 잇는 주요 간선로에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시설의 존재는 제주 행정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貢馬와 같은 주요 진상품의 이동로 확보는 제주목의 지방 행정력을 높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1702년에 제작된 <탐라순력도>에서도 대략적이나마 주요 교통로를 표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보문사지의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의 동측에 교통로가 있다. 寺域은 교통로보다 약 10여 미터 정도 낮은 분지형의 평탄 대지를 이루고 있어서 추정 사역의 남쪽에 위치한 남양 홍씨 선산과는 지표상의 단차가 있다. 추정 사역의 북쪽 입구에서 선산 하단의 경계석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00m이며 폭은 최대로 넓은 곳이 약 170m정도이다.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의 면적은 약 53,000㎡정도로 평탄하면서도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추정 사역이 앞에서 설명한 정도이지만, 고려~조선시기에 보문사지의 사역은 현재보다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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