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9) - 도덕경 -“무위의 도가 최상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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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9) - 도덕경 -“무위의 도가 최상의 정치”
  • 글 · 고은진 철학박사
  • 승인 2022.04.05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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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정치는
대자연의 큰 지혜로써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17장과 18장은 정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노자는 무위의 도가 최상의 정치라고 본다. 무위의 도가 정치의 원리가 되면, 공적을 이루고 일이 성취되어도 백성들이 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성취했다고 여기므로 누가 그 일을 이루도록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가장 좋은 정치이다.
그 다음은 군주를 친하게 여기고 명예롭게 여긴다. 정치는 인간이 세상을 개혁하거나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내세우려는 일을 전제해왔다. 이런 정치를 하는 군주는 백성들로부터 정치를 잘한다고 여김을 받는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그늘이 언제 드러날지는 알 수 없다. 비록 세상이 좋게 바뀐 것 같지만 큰 틀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구한말 신작로가 놓이고, 철도가 놓일 때 당시 백성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길을 통해 식민지 수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놓이게 될 줄을... 이러한 예는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다.
도덕적 이상주의 또한 무위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당위적이고, 명분적이다. 명분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러기에 위선적이기 쉽다. 그러나 무위의 정치는 인간의 이상에 따라 세상을 고치려 하지 말고, 인간 마음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마음이 허공과 같이 텅 빈 채로 자연과 회통하게 되면, 세상이 자연처럼 스스로 다스려진다는 것이 무위지치(無爲之治)이리라. 무위지치는 의지와 지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욕심을 버리고 고요하면 무위의 자연성에 저절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최고의 이상 정치를 백성들이 왕이 있음을 알지만 무위정치를 행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으므로 그가 있음만을 알 뿐이다. 무위정치는 언뜻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사려에 의존하지 않고 대자연의 큰 지혜로써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물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은 매일 공기를 마시면서도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한다는 것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이 공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공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어떤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정치는 유위의 정치다. 대표적 유위 정치가 바로 유가에 의한 통치이다.  
인의는 유가의 핵심개념이다. 공자에 따르면 인은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로써,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의 본질이자 존재 근거이다. 의는 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잘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행위의 규칙이자 판단의 근거이다. 인의는 도덕적 인간의 완성, 도덕적 국가의 실현을 목적을 하는 공자 사상의 핵심이다. 
사실 인의를 행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의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인의를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 사회가 이미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노자가 보기에 인의는 인위(人爲)적 고안품일 뿐으로 자연인 대도(大道)의 방식보다는 낮은 단계의 것들이다. 노자는 일체의 인위적인 것은 자연의 본성과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기에 거짓됨만을 조장한다고 본 것이다. 
대도는 무위를 행한다. 무위는 변화와 관계 속에서 스스로 그러함에 비해 인위는 모든 대상을 정지시키거나 구분시켜 놓는 지적 활동을 한다. 자연성을 기본으로 하는 무위의 대도가 무너지게 되면 인위적인 인의가 나오게 되고, 인위로써 구분하게 되자 구분 너머의 것은 거짓이 되게 된다. 그래서 지혜가 나오게 되자 큰 거짓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효자(孝慈)라는 사회 규범 또한 생겨나게 되고, 충신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들은 스스로 그러한 대도의 자연성을 잃은 상태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도가 행해진다면 그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진다. 저절로 다스려지면 질서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질서가 그 안에서 저절로 이루어져, 자식은 부모에게 저절로 효도하게 되고 부모는 자식을 저절로 보살피게 되고 신하는 군주에게 저절로 충성하게 된다. 효와 충이 이미 당연시된다고 한다면 효니 충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효자란 말이 있는 까닭은 불효자가 있기 때문이며, 충신이란 말이 있는 까닭은 간신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자를 말할수록 그만큼 불효자가 많은 것이며, 충신을 말할수록 그만큼 바르지 못한 신하가 많기 때문인 것이다. 
노자의 이 구절들은 반야심경의 부정의 논리와도 만난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다는 것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는 끝없는 반야심경의 부정의 논리는 바로 18장의 ‘대도가 무너지니 인의가 생겨났다’는  가치의 전복과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그것은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규범이 만들어지고 또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야 하는데 고정된 채 절대화되는 것들에 대한 전복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에서는 그것이 인의와 충효이고 불교에서는 相(상)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과 불교의 연기는 만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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