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37) - 여실지견(如實知見)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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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37) - 여실지견(如實知見) 4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4.1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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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정신 식별과 관련하여, 접촉(phassa, 觸)이 없다면 그 어떤 마음도 대상을 알 수 없다고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35회).  
12연기의 여섯 번째 고리인 촉(觸, phassa)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알음알이가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7가지 마음부수 중의 우두머리에 해당합니다. 오온 중의 행온行蘊에 속하고, 또한 감각접촉의 음식(觸食, phassa-āharā)이라 하여 모든 중생의 생존에 필수적인 네 가지 음식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체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크게 물질적인 대상과 정신적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밖의 물질적인 대상과의 접촉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문을 통해서, 안의 정신적인 것과의 접촉은 알음알이(識, mano, 마노)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따라서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알음알이意는 각각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심리현상)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門입니다. 알음알이(mano)의 문과 그 대상은 정신[名]이고, 나머지 감각의 문과 그 대상은 물질[色]에 포함되기 때문에 결국 열두 가지 감각장소들은 정신과 물질[名色]일 뿐입니다.
여섯 가지 안과 밖의 감각장소[內外六處]가 만나면 반드시 이들에 관계된 알음알이가 생겨납니다. 즉 눈과 형색이 만나면 눈의 알음알이-시각의식眼識이, 귀와 소리가 만나면 귀의 알음알이-소리의식耳識이, 코와 냄새가 만나면 코의 알음알이-냄새의식鼻識이, 혀와 맛이 만나면 혀의 알음알이-미각의식舌識이, 몸과 감촉이 만나면 몸의 알음알이-감촉의식身識이, 마노(mano)와 법이 만나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이것을 인식의 구조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면, 물 끓는 소리는 인식의 대상[境]이 되고, 감각기관[根]은 귀이고, 소리의식耳識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포착하는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경」(S35:107)에서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의 일어남인가?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 혀와 맛을 조건으로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사라짐도 설하셨습니다. 우리 앞에서 드러난 세상이란 것은 육근-육경-육식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을 통해서이고 그 이외에 6문 인식을 벗어난 어떤 초월적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님을 초기 경의 곳곳에서 강조하셨습니다. 
감각접촉의 순간에 아는 마음(=6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느낌과 인식이 함께 생긴다는 뜻에서 이를 구생연俱生緣이라 부르고, 생각[尋]은 틈 없이 뒤따라 일어납니다. 
오문 인식과정은 마음의 자연법칙에 따라서 똑 같은 절차를 따릅니다. 예를 들면 안문眼門 인식과정에서 눈은 ‘이것이 형색이구나.’를 알 뿐이고 무슨 형색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형색에 대해 과거의 경험(지각, saňňā)에 의해 결정되어진 개념 또는 전체의 이미지를 보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은 의문意門 인식과정에 속합니다. 마노[意]가 전 오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가끔 TV에서 영화를 보거나 유명가수의 현란한 춤사위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배우 또는 가수의 이름 및 이미지를 떠올리며 생각의 날개(papaňca, 빠빤짜)를 펼칩니다.  
단지 ‘봄’을 넘어서 거기에 심취하거나 몰입하게 되면 가려내고 선택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작용이 뒤따라 일어납니다. 세존께서는 이를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라고 말씀하시면서 갈애와 자만과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들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형색에 대해 ‘즐김’ 또는 감각적 욕망이 생기면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과 행동과 뜻으로 업을 짓게 하고 미래에도 탐·진·치의 잠재적 성향으로 그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우리 사람들은 욕계의 존재입니다. 욕계의 인식과정, 즉 정신이 일어남은 유익하거나 해롭기도 하고, 또는 이 둘이 아닌 무기無記일 수도 있지만 해로운 마음씨가 대부분입니다.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육문 인식과정에서 대상을 보고 그것을 물질, 정신, 원인, 결과 또는 무상, 고, 무아, 역겨워함으로 볼 수 있는 기능과 힘을 갖고 있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지혜로운 주의력이고 자와나(속행)의 마음은 유익할 것입니다.
색계나 무색계의 의문인식과정은 선정禪定 인식과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익하고 결코 해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욕계의 인식과정에서 여리작의를 놓쳐 버리고 대상을 개념으로 뭉뚱그려서 보거나 상常·낙樂·아我·정淨으로 본다면 자와나(속행)의 마음은 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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