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0) - 도덕경 -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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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0) - 도덕경 -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 글·고은진 철학박사
  • 승인 2022.04.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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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사물을 하나로 파악함으로
유연함을 유지한다

제22장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송나라 때 저공(猪公)이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준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러자 저공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을 비유한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대부분 눈앞에 나타난 면만 보고 선택하여 전심전력한다. 
우리는 흔히 곧은 나무를 쓸모 있는 나무라고 여기고 굽은 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고 여긴다. 그러나 곧은 나무는 쓸모 있음으로 해서 먼저 베어져 죽임을 당하는 반면에, 굽은 나무는 쓸모가 없음으로 해서 오히려 천수를 누릴 수가 있다. 이는 눈앞에 나타난 상황만을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의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자벌레 또한 몸을 굽힘으로써 뻗을 수도 있게 된다. 자벌레가 굽힌 상태만을 보고 자벌레 생김새를 말한다면 이는 자벌레의 본모습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굽어져야 곧아지고, 곧아져야 굽어진다. 곧 굽힘없이 곧아짐은 없고, 곧아짐 없이 굽어짐 또한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도 너무 많이 모이면 넘치게 되고, 옷은 낡아 헤어져야만 다시 새 것을 입게 된다. 욕심이 적으면 오히려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지식이 많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파임과 메워짐, 헐어짐과 새로워짐, 적음과 얻음, 많음과 곤혹 등등은 모두 반대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변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처럼 자연의 이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없음은 영원한 없음이 될 수 없으며 있음 또한 영원한 있음이 될 수 없다. 없음은 있음을 향하고, 가득 채워진 것은 반드시 쇠퇴의 길로 향하게 된다. 이처럼 우주는 서로 반대편 존재들의 짜임으로 생성, 변화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두 계열의 대립면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반대편에 두면서 꼬여 있기 때문이다. 
22장을 처세술로 잘못 읽으면 온전해지기 위해 굽고, 펴기 위해 휘어지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구절 즉 성인은 오직 하나를 지녀 천하의 규범이 된다는 구절을 보면, 굽은 것과 온전해지는 것, 휘는 것과 펴지는 것, 패이고 채워지는 것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을 알게 된다. 
이처럼 우주의 생성, 변화는 이러한 반대편의 짜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위 자연의 성인은 ‘반대의 일치’라는 위대한 진리를 통달하여 거기에 따라 한 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사물을 하나로 파악함(抱一)으로 유연함을 유지한다. 그러기에 천지자연의 도를 지켜 천하의 법이 되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굽은 것과 온전해지는 것은 연속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구분하여 굽는 것과 휘는 것으로 나누어 놓는다. 무위자연의 성인은 분별을 넘어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자신을 옳다 하지 않기에 그 좋은 것이 세상에 나타난다.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이 자기의 것이 되고, 자신의 우쭐댐을 버리기에 언제까지고 존경을 받게 된다. 
모든 생명은 자연계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천수를 다하면 자연계로 돌아간다. 그래서 성인은 절대로 남과 다투는 일이 없고, 세상에 그를 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없다. 옛 사람이 말하거늘 굽은 나무는 제 수명을 다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인생의 진리를 제대로 말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인과 굽은 나무는 수명을 온전히 마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인의 사유 방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다르지 않다. 자기 중심적 아상(我相)을 내려놓고, 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보게 되면 변화 그대로 무심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기 긍정과 자기주장의 아집은 도(道)와는 거리가 멀다. 무심히 무아의 상태를 견지할 때 도는 자연히 드러나 빛난다. 이것이야말로 포일(抱一) 즉 반대면들을 하나로 안는 도(道)의 모습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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