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오늘 분명히 알고 가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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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오늘 분명히 알고 가셔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5.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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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자체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교육 필요
비워내고 비워내고 텅 비워내야만 이를 수 있어

남국선원(선원장 성묵 스님)에서 지난달 20일 혜국 큰스님을 모시고 49재 법문을 듣는 소중한 자리를 마련했다. 혜국 큰스님께서는 이날 법문을 통해 우주 존재의 원리를 찾아가자고 불자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셨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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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승길에 돌아가신 지 오늘 49일째가 되어 모든 가족들이 모여 청정수행도량에서 49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삶이 아름다웠으면 죽음도 아름답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아있는 사람은 78억이고 돌아가신 분은 천억하고 60억이 넘었다고 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오늘 분명히 알고 가셔야합니다. 우리나라가 교육열은 최상위권이지만 죽음의 교육, 나는 과연 누구인지 하고 묻는 교육은 중간정도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 태어날 때 같이 있었고 죽어서도 같이 있고 나를 떠나지 않는 그 마음 찾아 나서는 것을 49재라고 합니다. 
단 한순간도 떠나지 못하는 게 허공입니다. 태어날 때도 허공 속에 있었고 그 허공 덕에 우리는 숨을 쉴 수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토끼가 뛰어다니는데 그런데 허공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래서 황벽선사가 “허공이 너의 참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눈에 보이는 저 허공이 그 허공인줄 알면 십만팔천리라. 내가 있을 때 허공은 나와 남이 생기지만 참생명을 깨닫고 보면 허공과 나에게는 상대가 없습니다.
살아생전 억울했던 생각을 하면 영혼에서 무슨 색깔이 나옵니까? 까만 색깔이 나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에도 고마운 마음을 낸다면 어떻습니까. 
“태양열 에너지 그 은혜, 우주 생명이 내 생명이었지…” 
내가 먹을 것을 내가 만든 일이 없어요. 식물들은 광합성을 하는데 인간은 그러지 못합니다. 
우리는 평생 식물들이 만든 것을 얻어다 먹고 살고 있어요. 
이 몸뚱이가 있을 때 그러한 생명이 필요한데 49일 전부터는 허공 자체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구에 내 생명 아닌 게 하나도 없었는데 모르고 살았구나!” 합장하면서 고맙습니다라고 한다면 맑은 색깔이 나와, 그러한 것을 광명이라 하고 극락세계라 합니다. 
오늘 행복을 만들면 나는 행복이라. 
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아, 같은 강물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한순간도 고정된 존재가 없습니다. 현재 내가 행복이면 행복이고 현재 내가 불행이면 불행이지,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허공은, 공성이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마웠던 일 원망했던 일 그게 내가 아니라, 그것까지 놔버렸을 때 우주가 내가 됩니다. 
성철 스님이 “몇 근이냐” 물으면 우리는 크다 작다 상대성에 익어진 원인으로. 데카르트 같은 철인이 나와 이원론에 사로잡혀, 이런한 것에 익어져 상대성에 속았습니다. 집착까지도 놔버리면 텅빈 공성이라. 생명의 본질은 공성이라 대자유라. 내 마음 한 번 들여다봐요. 
이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대로 됩디까?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빌려온 것이기에, 자연이란 주인에 의해 움직여지지. “자연에 의해 움직여지지 내 것이 아니구나”
‘나는 누구인가’ 영원히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 그 자리를 찾아가보자 하는 것입니다. 
태양 자체는 죽음이 없어, 그 길로 가보자는 것입니다. 
“몇 근이냐”
회자의 머리는 희고 회의 머리는 검다.
마조 스님이란 큰 스님이 계셨는데 어떤 수행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 마음 공부하는데 반드시 이정표가 필요하고, 이정표를 수행자들은 스승이라고 합니다. 
우주 자체 생명 찾아보고자, “스승님, 저는 한평생 감정에 끄달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한평생 보냈지, 내 감정이 어디서 나오지 하는 물음은 못 내었단 말입니다. 
제주에는 녹나무 구슬잣밤나무 그런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저 목련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뿌리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나무에 있는 것도 아니요, 줄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주위에 어떤 여건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돼버렸다면 얼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얼음은 기온이 인연이 되어 나타납니다. 인연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깨달으며 공성이 되어 대자연이 됩니다. 연기법이 있을 뿐이지 실체가 없습니다. 
오늘 깨닫는 길, 참나를 찾아서 중심을 잡아서 감정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길 어떻게 가는 길입니까. 내가 내 주인노릇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이렇게 물으니 마조 스님은 바빠서 말 못하니 백장 스님과 지장 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백장 스님도 모른다고 하고 지장 스님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왜 모른다고 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성철 스님 법문을 구름 잡는 소리라 하는데 지옥과 극락 세계를 하나로 만든 공성이 된 세계인줄을 몰라요. 
인간은 감정의 세계 밖에 말 못해요. 왜 모르겠다고 했을까.
“백장의 머리는 희고 지장의 머리는 검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일어난 다음 것만 글로 표현합니다. 이전은, 존재원리 자체는 고요 그 자체입니다. 허공에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습니다. 
이 몸뚱아리로 살아온 것 그릇 속의 달이고 진짜 달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달은 물 비우는 족족 달을 비추게 마련입니다. “고로 삼라만상의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도다.”
미국에 비친 달이나 인도 갠지스강에 비친 달이나 제주 바닷가에 비친 달이나 하늘의 달은 한 생명이라. 그걸 깨달을 때 환희심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하고 그 길로 가자. 어떻게 갈 거냐. 비워내는 것입니다. 비워내고 비워내고 텅 비워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사라호 태풍이 지나갔는데 그때 태풍 때문에 손해 본 사람 소송하는 거 봤습니까. 태풍에게 화병 난 사람이 없어요. 인간관계도 자연현상 받아들이듯 하면 상처받을 일 없습니다. 
영원한 자연의 길, 비워내는 길로 가보자는 것입니다.  
“백장의 머리는 희고 지장의 머리는 검다.” 
못 알아 듣는 것은, 내가 있으면 못 알아들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을 비워 내면 영혼이란 몸통이 있는 것, 그릇 속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그릇이 꽉 차있을 때 아무것도 못 들어가 그 그릇을 깨버리면 하나가 됩니다. 
연속극을 보거나 하면 잡념이 하나도 없어. 그릇 속에 흙탕물을 계속 휘젓고 있는데 보일 리가 있습니까. 

참선을 하면 “이 뭣꼬” “나는 누구인가” 안으로 에너지가 들어오면서 주인 찾아가게 돼 온갖 찌꺼기가 다보입니다. 
이제 갈 길을 가자, 내 자신 행복을 찾는 길로 가보자, 화났던 생각 미웠던 생각 가라앉아, “이 뭣꼬” 더 가라 앉으면 달이 훤히 비춰 해인삼매라. 물뿐이여, 온 생명은 공성뿐. 이 그릇이 없어질 때까지 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이 뭣꼬”. 이것만 재미 붙이면 천하를 줘도 안 바꾸고 싶어요. “자신이 공성이요, 자신이 부처요, 존재 원리, 우주와 둘이 아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뭣꼬” 모르는 것만 남아, 모르는데는 비교가 없어, 모르는 걸 찾아가자는 거요. 알 수가 없어 얼마나 평화로운가. 이것을 극락이라고 합니다. 
그 길이 “이 뭣꼬”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력을 끝없이 끝없이 오늘부터 해보십시오. 마조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부디 눈에 보였던 모든 현상에 속지 말고 이 우주의 존재원리 자체로 돌아가십시오. 내가 “이 뭣꼬”할 때 모르는 것이 그릇이 깨지면서 벽이 허물어지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당신 고향 소식이더라. 이 뭣꼬 참구하여 정성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라라리 라라 탁형가를 불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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