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하다
각원사 대웅보전 북쪽 벽의 첫 번째 칸에 그려진 벽화는 총 15장면(석씨원류 75~89번째 장면)이다. 아래로부터 두 번째 칸 맨 우측에는 석씨원류의 80번째 장면인 옥야수훈(玉耶受訓), 그 위로 어인구도(漁人求度), 월광간부(月光諫父), 신일독반(申日毒飯), 불화무뇌(佛化無惱), 항복육사(降伏六師), 지검해불(持劍害佛), 불구니건(佛救尼犍), 초건계단(初建戒壇)과 89번쩨 부선계법(敷宣戒法)이 그려졌다.
이 중 80번째 옥야수훈(玉耶受訓)은 불교 경전에서 드문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옥야경』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가정에서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가 제시되어 있어서 고대 불교의 여성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기원정사를 세운 수달(수닷타, 급고독)장자는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는데, 자신의 가문과 미모를 믿고 교만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제대로 공경하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던 수달장자 내외는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있던 부처님께 찾아가 예를 올리고 자기 집에 오셔서 법으로 며느리를 교화해 주기를 청했다. 수달의 청을 수락한 부처님은 다음날 제자들과 함께 수달의 집을 방문했다. 부처님이 오시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나와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데 옥야는 방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집안 곳곳을 유리와 수정으로 만들어 훤히 보이게 만들었다. 숨어있던 옥야는 부처님의 몸에서 금빛 광명이 나는 것을 보고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서둘러 나와 예를 올리고 잘못을 빌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옥야를 위해 여인이 갖추어야 하는 덕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아무리 용모가 아름답고 잘 꾸미고 좋은 옷을 입어도 마음이 교만하면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며, 간사한 태도와 허물을 없애고 마음을 한결같이 해야 아름다워진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여인에게는 태어날 때 부모가 아들이 아니어서 섭섭해하고, 아들만큼 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마음에 겁이 많아 불안해하고, 부모에게 시집 보낼 걱정을 끼치고, 부모와 헤어져 살아야 하고,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받고, 남편 눈치를 보아야 하며, 어려서는 부모에게, 결혼하면 남편으로부터, 늙어서는 자식에게 구속받는 숙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인이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는데 다섯 가지 착한 일과 세 가지 악한 일이 있다고 하시며 그에 대해 설명하셨다. 이어 세상에 있는 일곱 종류의 아내에 대해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착한 아내와 두 종류의 악한 아내가 있는데, 다섯 종류의 착한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어머니, 누이, 친구, 며느리와 같은 아내와 종과 같이 순종하는 아내이고 악한 아내는 원수 같은 아내와 목숨을 빼앗는 아내라 하셨다. 옥야가 자세히 설명해달라 하자 친구 같은 아내는 남편과 서로 간절히 사랑하고 생각하며, 서로 의지하고 그리워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고,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일을 숨기지 않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충고하여 행실에 실수가 없게 하며, 착한 일은 서로 가르치며 친구처럼 서로 사랑하는 아내이고, 원수 같은 아내는 남편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화를 내며 서로 헤어질 생각만 하고, 따스한 마음이 없어 서로 빌붙어 사는 손님처럼 여기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도 없고, 헝클어진 머리로 누워서 일하지 않고, 자식을 돌보지도 않고, 혹 부정한 짓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친지나 동기를 욕되게 하는 이가 원수와 같은 아내라 했다. 그리고 착한 아내는 말과 행동에 법도가 있고 사람들이 사랑하며 항상 즐거움으로 가득한데, 악한 아내는 몸이 편치 않아 병이 들거나 매일 악몽에 놀라며, 죽은 뒤에는 지옥, 아귀, 축생도를 헤매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옥야에게 어떤 아내가 되고 싶냐고 묻자 옥야는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며 종과 같은 아내가 되겠다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허물이 있어도 있는 줄 모르는데, 이를 알고 고치면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이 없다고 칭찬하셨다.
이 아내 또는 부부가 지켜야 할 도리를 보면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도리와 비슷하다. 서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도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경이 만들어진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는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더 적어졌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원사 벽화(사진 1)와 그 원본인 석씨원류 판화(사진 2)에는 부처님은 위쪽 전각에 앉아 계시고,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수달장자 내외이고 옥야와 그녀의 남편은 마당에 무릎을 꿇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이어서 그려진 어인구도(漁人求度)는 한 어부가 몸에 이상한 혹들이 달린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부처님께서 보시고 과거 총명한 이가 불법을 배웠는데 다른 이들과 토론하다 굴복할 상황이 되면 온갖 좋지 않은 말로 상대를 욕한 과보로 이상한 물고기로 태어났다고 하셨다.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삼가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일독반, 월광간부, 불화무뇌, 지검해불, 항복육사, 불구니건은 부처님을 해치려는 외도들을 항복시키거나 사람을 죽여 그들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닌 앙굴리마라와 같은 악한 이들을 교화시키는 내용이다.
벽의 맨 위쪽 오른쪽에 그려진 초건계단(사진 3)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를 때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부처님께 계단을 세워 결계와 수계를 해 주시기를 청하자, 부처님께서 허락하고 처음으로 세 개의 계단, 즉 비구결계단, 비구니결계단과 승가를 위한 비구수계단을 세웠다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3층의 계단은 세 가지 공(空)을 뜻하며, 불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첫 번째 문에서 모든 번뇌를 버리고 풀어야 하는데, 공이 아니면 이를 멀리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초건계단은 18세기에 제작된 팔상도 녹원전법상에 표현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통도사 녹원전법상(사진 4)에는 중앙에 초건계단을 배치하고 양쪽에 아쇼카 왕의 전생 이야기인 소아시토(小兒施土)와 기원정사 이야기인 포금매지(布金買地)가 그려졌다. 양쪽의 두 장면은 보시를 강조하기 위해, 중앙의 초건계단은 결계와 수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석씨원류에서 차용하여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