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기록문화탐구 - 제주 별칭과 전법의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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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기록문화탐구 - 제주 별칭과 전법의 흔적을 찾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6.22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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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_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이지범_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국내 모 일간지에 해녀를 가리키는 ‘인어의 나라, 탐라도(耽羅島)’가 실렸다. 이무영 기자가 1935년 7월 30일 ‘물의 나라 기행’이라고 쓴 기사에는 푸르스름한 귤나무의 그늘과 인어가 사는 탐라섬, 제주도에서 떠나는 배인 태서환 갑판에서 다시 그리울 경치인 정방폭포에 대해 다뤘다. 또 1909년 8월 발행된  《서북학회월보》 에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으로, “제주는 옛 탐라국이다. 감귤이 생산되는데, 진상품으로 동지섣달부터 바친다.”라고 했다.
이처럼 섬의 방언으로 “돌·보름·비라가 많다.”는 뜻의 삼다(三多)와 “거지・도둑・대문이 없다.”는 삼무(三無)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인심(情)・자연・열매가 많다.’라는 삼려(三麗)의 섬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여행, 관광지라 불린다. 1952년에 처음 발표된 가수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에서부터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같이 귀엽구나. … 삼다도라 제주에는 돌멩이도 많은데, 발부리에 걷어채는 사랑은 없다 드냐.”라는 노랫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삼다삼무라는 다소 자조적인 제주도의 별칭은 한림읍 금릉마을에 살던 금릉인이 일제강점기 때의 잡지  《삼천리》 (1936년)에 기고한 ‘제고장서 듣는 민요 정조, 제주도 멜로디’란 글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제주도는 자급자족의 고장입니다. 제주도를 가르쳐 풍다(風多)·석다(石多)·여다(女多) 즉, 삼다(三多)의 고장”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사료 부족으로 ‘금릉인’에 대해 재조명하기 어렵지만,  《삼천리》  잡지에 기록된 ‘금릉촌(金陵村) 묵사료(黙思寮)’는 유일한 추적 단서다. 글쓴이는 해방 전후까지 금강산 승려들이 금강산인, 지리산 승려가 지리산인이라 칭하고 표기했듯이 자신의 이름을 지역에 붙인 ‘금릉인’이라 썼을 뿐만 아니라, 또 글의 끝에 써놓은 금릉촌 묵사료는 금릉해변이 자리한 한림읍에 있던 사찰 승방(僧房)을 가리키는 건물 이름으로 추정된다. 석왕사 인지료와 복흥사 육지료, 범어사 안심료 등이 대표적인 승방이다. 민가에서는 건물 편액을 붙이는 것이 제한되었으므로 관공서보다도 절 건물로, 승려 출신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기록을 통해 그간 “예로부터 불러왔다.”라는 별칭 유래에 대해 다시 고증해 볼 까닭이 있다. 또 “제주 4·3 사건 때 남자가 많이 죽어서라는 설도 있다.”라는 기존 구술자료의 한계와 학술적 오류를 찾을 수 있다. 그간 언제부터, 누가 붙인 것인가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제주도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사용해 온 것이 아이러니하다. 제주 출신의 금릉인은 기고한 글에서 “제주도는 도적이 없고, 걸인이 없고, 맹수가 없어서 삼무(三無)이거니와 이야말로 삼소(三少)가 아니라 절대 삼무(三無)입니다. 혹은 말하되 제주도는 절해고도가 되어 도적과 맹수가 도망할 곳이 없어 그러하다 하나. 나는 도적과 걸인이 없는 이 현상을 이 섬 주민들의 여유있는 생활의 증거라고 봅니다.”라고 재평가했다. 
단순히 제주도의 풍광과 특성을 함축한 의미와 눈과 귀에 익은 내용과 달리 폭우해일(水災)・가뭄(旱災)・폭풍(風災)의 세 가지 재난을 입었던 극한의 섬이다. 돌이 많아 농사가 어렵고, 공물과 부역하던 공귤(貢橘, 귤 바침)・채복(採鰒, 전복따기)・목자(牧子, 소말테우리) 등은 고난의 상징과도 같은 용어들이다. 다시 톺아봐야 하는 제주도의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아름다움보다는 아픔이, 그리고 깊은 울림이 묻어있다.

금능포구에서 마을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살던 승려 한 분이 스스로를  ‘금릉인’ 이라 써서 1936년삼천리 잡지에 기고했다.
금능포구에서 마을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살던 승려 한 분이 스스로를 ‘금릉인’ 이라 써서 1936년삼천리 잡지에 기고했다.

특히 1931년 일본 오사카 중도문화당에서  《야월의 한라산》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항쟁’과도 비견될 정도의 참상이 실려 있다. 
일명  《리재수 실기(實記)》 로 알려진 이 책은 1900년 5월부터 이듬해 상반기까지 제주도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프랑스 신부 등 가톨릭교도들에 대해 항거한 ‘리재수 난’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도민항쟁을 이끌었던 민중들이 추대한 지도자 리재수의 한 평생을 기록한 글이다. 그의 누이동생 리순옥이 오라버니의 피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해 조무빈의 집필 도움을 받아 만든 사실적 회고록이다.
제주 출신의 조무빈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근 백년 동안 암암리에 포교에 진력하여 그 세력은 장차 우리 삼천리강산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만일 리 의사가 없었더라면, 프랑스(佛國)의 세력과 교도들의 횡포가 전 조선에 파급되었을 것이다.”라고 책에서 밝힘으로써 ‘리재수의 난’을 제주도에서의 사건으로, 종교적 소요(敎難)이나 민란으로 규정하던 보수 종교계나 지배계층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적 입장에서 당시의 민중항쟁을 기록해 근대 역사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이 제주 역사와 문화 속에는 철저하게 지배층으로부터 억압과 왜곡된 이면이 많다. 또한 기록에서도 삭제되거나 통제된 부문이 있다. 이렇듯 풀어지고 헐거워 저버린 제주의 희미한 역사에서 고려대장경 등 전법의 흔적을 추적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기록은 어떻게 지웠을지라도 DNA로 전해지는 기억의 복원과 흩어진 파편들을 통해 다시 시도할 수 있다. 
퍼즐 맞추기와 같은 제주도에 전해졌던 전법의 실상은 탐라・탐모라・담라・탁라 등과 별칭 섭라의 이름으로부터다.  《삼국사기》 에  476년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주었다.”는 앞선 기록으로 보아 기원후 3세기경부터 존속한 고대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 에 “탐라는 섬을 말하는 탐과 나라를 의미하는 라가 합쳐진 섬나라”라고 했다. 
고려 왕조에 복속될 때까지 탐라국은 분명 실존했으면서도 그 처음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실체가 어떠했는지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는다. 공식적 명칭은 1223년부터 ‘제주’로 바뀌었으나, 몽골이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은 1273년 이래 ‘탐라’로 일컬었다. 따라서 제주 지역에 불교가 전래, 유통된 시기의 명칭은 제주와 탐라가 혼용되었다.
19세기 초 편찬된  《탐라국왕세기》 에 684년 고지창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문자를 도입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일찍부터 문화교류가 됐다.  《고려사》 에는 938년 12월 탐라국 태자가 (개경에) 입조하다. 고려 초조대장경이 조성을 처음 발원한 때인 1011년 9월 15일 고려조정에서 탐라국에 주기(朱記, 붉은색 글로 쓴 공식기록문서)를 내려 주었다. 1034년 11월 4일 중국 송나라의 상인, 동번, 서번, 탐라국은 개경으로 들어가 팔관회를 기념하는 교류와 예식에 참석하는 등 이후 상례로 삼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때로부터 고려 국가행사 초청 또는 의전국의 위상으로 참여한 탐라국에 당시 선진국 최고의 기술력으로 꼽힌 대장경 조성에 이은 유통이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초조대장경 판각 23년이 경과한 시점으로 탁본(印經)과 경전 봉안이 본격화하던 때였다. 특히 고려대장경 조성 1단계 사업이 완성된 후, 1099년 4월부터 고려 주도의 대장경 교류가 확산하면서 탐라국에도 무역 등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충렬왕 때 제주 산방굴사에서 활동한 혜일 선사는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등에 대한 찬시(讚詩)를 남겼으며, 1343년 왕사를 역임한 흑선대사와 충목왕 때의 승려 종범선사가 탐라에 유배되면서도 경전 유통과 강독을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려시기에 창건한 존자암, 수정사, 원당사 등과 만수사, 혜륜사는 조선 시대에 빈 절터로 신장상과 부도 등이 남아 있다. 
18세기 초, 이형상 제주목사가 미신타파를 목적으로 “굿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을 파괴했다.”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조선총독부의 조선교육회가 발행한 잡지인  《문교의 조선》 (1928년)에 처음 등장한다. 자신의 문헌에서와 같이 이형상은 그전에 부임했던 목사들과 달리 제주도 풍속에 대해 적극 개입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영등굿을 비롯한 제주 토속신앙의 상징인 굿당 129개소와 절 5곳을 폐사시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숙종실록》 (1703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명산대천은 모두 소사(小祀)에 기록되어 있으나, 유독 한라산만은 사전(祀典)에 누락되어 있습니다.”라고 건의하여 국가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처음 치렀다는 사례로 보면,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법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국적 요소들이 가득한 제주도의 풍광은 신선이 사는 물가의 아름다운 10가지 경치를 말하는 ‘영주십경(瀛州十景)’으로 대변된다.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익태의  《지영록》  <탐라십경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19세기에 이한우가 붙인 성산일출・사봉낙조・영구춘화・정방하폭・귤림추색・녹담만설・영실기암・산방굴사・산포조어・고수목마(古藪牧馬)라고 회자된다. 20세기 정재민의 ‘영주십경도 십곡병’이란 그림은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져 풍속화적 의미가 엿보인다. 
여러 풍속과 말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제주도는 분명 한반도를 이루는 최고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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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2009년부터 고려 때 만든 3종 대장경의 전산화와 연구하는 대장경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또한 북한문화와 종교 등에 관한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는  ‘고려대장경의 비밀’ ,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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