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탑만으로도 사찰 규모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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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탑만으로도 사찰 규모 짐작”
  • 김은희 기자
  • 승인 2022.07.26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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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신라 역사 문화의 보고 감은사 주제로
21일 관음사불교대학 재학생들에게 강의
관음사불교대학 재학생을 위한 특강이 마련됐다.
관음사불교대학 재학생을 위한 특강이 마련됐다.

지난 21일 관음사불교대학 재학생들을 위한 의미 있는 특강이 열렸다. 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신라 역사 문화의 보고 감은사”라는 주제로 특강을 펼치면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에 대한 신심, 불교문화와 국제교류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한정호 교수는 감은사는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뜻을 가졌는데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서두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했다. 
‘감은’은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문무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를 지닌 사찰이름이라고 했다. 이어서 한 교수는 감은사라는 절은 왜 여기에 있을까를 물었다. 그 곳에 위치한 이유는 문무왕 수중묘 때문이라고 했는데, 불교식 다비를 하고 그 뼈를 바다에 묻어 문무왕 수중묘가 만들어졌고 그 뼈를 모신 공간 때문에 여기에 감은사가 있다고 했다. 또 왕릉 안에는 중요한 보물이 있어 왕릉을 보호하고 왕릉과 관련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사를 세웠는데 경주에 있던 후대왕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머물면서 제사 지내기 위해 감은사도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한 교수는 “이 감은사는 임금이 머무는 곳은 궁궐인데 사찰이면서 때에 따라 궁궐의 역할도 했을 것”이라며 “과거엔 이곳이 바닷가여서 배를 타고 축대에 배를 대어 감은사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사찰터를 보면 탑과 금당(법당)이 있고 회랑으로 둘러져 있어 중문을 통해 사찰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 부여의 낙화암 맞은 편에서 발견된 왕실 사찰에서 나온 사리장엄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 절도 낙화암 궁궐에서 배를 타고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 감은사도 백제의 기술을 가져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감은사가 신라만의 기술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술이 합작해서 만들어진 절이라 할 수 있다. 

신라문화의 보고 감은사를 주제로 강의가 이어졌다.
신라문화의 보고 감은사를 주제로 강의가 이어졌다.

또 감은사의 법당 뜰 안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감은사의 금당은 돌로 마루를 깔고 지하 공간이 있어 여기가 용이 들어오는 공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익산에 가면 미륵사가 있는데 백제 무왕의 왕비가 절을 지었으면 하는 원을 세워 지어진 이 미륵사는 절터에는 금당이 세 개 있는데 감은사와 똑같은 금당인데 여기는 나무로 짜여진 금당이다. 거기엔 홈들이 파여져 나무를 걸칠 수 있게 했는데 이것으로써 감은사 역시 백제의 기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하 공간은 용과 관련이 있다. 미륵 다른 말로 하면 미르가 되는데 미르가 바로 용이다. 일본에 사천왕사가 있는데 금당이 있고 금줄이 쳐져 있는데 용정이 있어 안내판에 보니 이 우물은 금당 본존부처님 밑에 청룡지를 수원지로 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 역시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용이라는 존재는 한 마디로 물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기후제를 지낼 때 용을 모시고 기후제를 지낸다. 그런데 왜 법당에 물이 있어야 되느냐를 묻게 되는데, 부처님이 어디에 앉아계시냐를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바로 연꽃 위에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연꽃은 바로 물 위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물하고 법당이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용이 연꽃을 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용이 입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법당 밑에 용이 있다는 거는 물이 있고 거기서 연꽃이 피어나 부처님을 모신다는 의미가 된다. 용대신 물병을 그리기도 하는데 연꽃대좌가 있고 병이 있고 연꽃이 피어난다. 
한 교수는 “미륵사는 639년쯤 만들기 시작해 645년쯤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륵사 탑을 만들었던 사람 신라에 포로로 잡혀가 감은사탑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감은사탑은 신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석탑으로 기둥인 찰주가 있는데 지금은 다양한 장식들이 다 떨어져 나가 심만 남아 있다. 찰주가 상징하는 것 천상계와 지상계를 연결하는 의미를 가지며 찰주 밑에는 주춧돌이 있어 심초석이라고 해 구멍을 파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 
그런데 왜 탑을 이 크기로 탑을 만들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되묻는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설계도면이 있으면 되는데 그걸 찾을 수 없으니 어떤 방법으로 이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도면으로 만들면 설계도가 된다고 했다. 탑 전체 높이는 가장 넓은 면의 두 배이며 탑을 눕혔을 때 탑의 끝이 이 건물을 침범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원리까지 대입해서 세워졌다는 것이다. 
사리 장식은 1959년도 발굴하고 1996년도 발굴했다. 사리병을 보면 3.5센티 수정으로 만든 것이 위에서 뚫고 밑에서 뚫고 밑에 받침이 있고 위에 뚜껑이 있는데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금알갱이를 금에다 부착해 장식했다. 사리는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로 가장 뛰어난 작가가 만들었다고 한다. 네 귀퉁이에 춤을 추는 동자가 있는데 재료가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밝혀져 당시 국제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도 확대시켜서 보니 커 보이지 실제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 크다. 풍경도 있는데 1센티 크기로 실제로 보면 살겨 크기로 네 방향에 금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다. 사천왕도 675년 용문석굴 사천왕과 비교해보면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은 본으로 조각을 만든 것이다. 이런 걸 통해 서로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문화전파의 시간도 예측할 수 있는데 한중일 문화교류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사리장식이 100% 복원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스님들이 공양올리는 모습을 보면 지금 밖을 보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사천왕은 무장하고 있어 부처님에게 등을 돌려야 맞지만 스님은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기에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사천왕도 자기보다 높은 분이 있을 땐 귀퉁이에 모서리에 있어야 맞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마지막으로 2주 전에 뉴스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는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온 이야기를 전했다. 최근에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껌종이에서 은박지 4분의 일을 반으로 나눈 크기이며 두께도 껌종이 은박지보다 약간 두꺼운데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크기가 100원짜리 동전보다도 작은 크기로 두께도 잴 수 없을 만큼 얇다고 했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유물 중에 금의 순도가 가장 높은 99.9라고 했다. 여기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머리카락 굵기의 반 정도 되는 선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새가 두 마리가 보이며 확대해 보면 사람이 보이는데 그림으로 보니까 100원짜리 동전보다 작은 공간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서 놀랍다고 했다. 한 교수는 “어떻게 정교한 걸 만들었나” 생각해볼 수 있는데 사람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 부처님을 위해 만들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종교는 기적을 만든다”고 할 수 있으며 “지극한 신심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신라 사회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이기에 이런 것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얼마만큼 신심을 가지고 신행을 하고 있는가가 조상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한정호 교수는 강의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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