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금강경 - 네 번째 이야기-허공과 같은 마음 - “일체 드러난 모든 현상이 양자의 변화, 즉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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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금강경 - 네 번째 이야기-허공과 같은 마음 - “일체 드러난 모든 현상이 양자의 변화, 즉 화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7.2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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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멈춤을 열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파도 스스로 영원하고 독립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존재라는
자아의식의 멈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체와 성을 진공묘유(眞空妙有) ‘참으로 빈 가운데 묘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란 표현으로 묶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 심상(心相)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 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通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야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현대어로 옮겨 보겠습니다.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모양(형태) 없는 생명과 밖으로 해, 달, 별과 산, 들, 강과 같은 만 가지 모습을 지닌 일체 감정과 생각이 없는 생명과 사람, 짐승, 벌레 할 것 없이 자각 있는 모든 생명들을, 性海(금빛 에너지로 가득 찬 모양이 바다와 같다 해서)에서 바람 없이 저 스스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고 보면서 천 백억의 화신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석가모니불이라 생각해라.” 이것이 불교의 생명관입니다.  

불교철학에서는 유정(有情), 생명뿐 아니라 산, 들, 바다, 지구, 별과 같이 무정(無情)들도 생명으로 봅니다. 생각 하나하나도(無色衆生) 양자상태(空性)로부터 일어나고 사람, 짐승, 산, 들, 바람, 할 것 없이 일체 드러난 모든 현상이 양자의 변화, 즉 화신이라는 뜻입니다.
개체 하나하나는 따로따로인 것 같지만 전체로서는 양자의 변화된 모습들인 것이지요. 결국 화엄경 사구게에서 말한 우주의 시작과 끝이 이것으로부터이고(엄밀히 말하면 시작과 끝이 없음. 불교철학은 시작과 끝을 싸이클링 즉 순환구조로 봄)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것이고, 법계의 성품이라는 것도 이것을 가리키며, 일체유심조 또한 이것을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空中)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정혜(定慧)를 닦는 것도 이것을 체험(證智)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함께하는 흐름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일상성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다가 있습니다. 바다를 性海(양자 상태)라 보고, 수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파도들을 화신(化身) 즉 개체로 봅시다. 그 개체 하나하나는 바다로부터 일어납니다. 여기서 그 개체 중 하나가 자기의 존재가 독립되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바다로부터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바다의 움직임의 일부분이라는 자각과 함께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我相)을 놓아 버리고 전체로서의 바다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서 파도가 안 일어납니까? 그래도 파도는 쉼 없이 계속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다만 바다라는 전체가 되어 파도로 작용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파도라는, 한정된 개체로 사느냐 이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보고 듣고 작용하는 일상성 이대로가 진여실상이지 이것을 떠난 특별한 상태로 진여실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쯤에서 지난번 장에서 보았던 아함경 구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그것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유유히 한없이 흘러가는 커다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 흐름이 멈추면 순간도, 찰나도, 그 다음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흘러간다. 브라만이여, 인간의 삶이란 큰 강과 같은 것이다.”

“그 흐름이 멈추면 순간도 찰나도 그 다음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반야심경의 “공한 가운데는 모양도 없고 느낌도 없고 인식도 없고 의도도 없으며 앎도 없다.”라는 말씀과 연결되지 않나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멈춤이란 없습니다. 다만 멈춤이라는 표현으로 그 어떤 상태를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 상태란 연속하려는 자아의식의 멈춤을 말합니다. 고타마 붓다께서도 그 자아의식의 연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셨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고타마 붓다가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전체로서 존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파도는 찰나도 멈춘 바가 없이 계속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열반이란 파도의 멈춤을 열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파도 스스로 영원하고 독립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존재라는 자아의식의 멈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러나 그것은 계속 흘러간다. 브라만이여, 인간의 삶이란 큰 강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쓰는 마음이란 개념은 감정, 생각 등을 포함해서 허공적 심계,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성품, 그것의 변화된 모습인 심상 등을 포함한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불교에서는 그 셋을 구분 지어서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空, 性 ,相  一如 라 하여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마음을 말하는 것이요,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 또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서 의상조사는 법성게를 통해서 밝히시길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하여 한 티끌 속에 우주를 머금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즘 쓰는 말로 바꿔서 간략하게 그 뜻을 드러내면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라는 말로써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를 독립시켜 보면 제 각각의 성품과 모습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로 보면 한 흐름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보살과 범부의 차이는 ‘개체로 사느냐 전체로 사느냐’입니다. 전체로 살면 모든 갈등과 분열의 원인인 에고ego가 사라집니다. 그 마음을 ‘포근함’이라고 하고, ‘따뜻함’이라 하고, 비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 함께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慈,悲,喜,捨 즉 사무량심) 반대로 ‘나’라는 것을 내세워 살면 분열의 삶, 갈등의 삶, 닫힌 삶, 제한되고 한정된 삶, 중생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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