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8회 신행수기 공모 우수상 수상 작품 - 오늘도 합장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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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8회 신행수기 공모 우수상 수상 작품 - 오늘도 합장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0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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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이 불안할 땐 향 하나를 피우고 가부좌를 틀어 가끔 명상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마음이 진정이 되고 지금의 나를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좋다. 
이건 아이들이 어릴 땐 엄두도 못 냈었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하나둘 자기 생활들을 찾아 나가고부터는 나의 시간이 많이 생겼다. 이런 행동이 나온 것도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습관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진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2019년 8월 6일 오후,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저녁을 하려고 냉장고를 살펴보던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한 남동생의 전화다. 
“누나! 누나!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엠블런스 타고 병원으로 가셨어!.....” 
‘뭐라고??’ 내가 잘 못 들었나?? 하고 몇 번을 물었다. 
침착해야지, 침착해야지 하면서도 손과 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왈칵하고 눈물은 또 왜 이리 하염없이 쏟아지는지....
나는 나의 아버지가 특별하면서도 존경스럽다. 나는 큰딸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주셨고 기쁨을 한 몸에 안고 자랐다. 아버지는 가족도 없이 홀로 제주에 오셔서 젊으실 때 고생을 많이 하셨다. 가정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머니와 더불어 열심히 사셨다고 하셨다. 힘들 때일수록 가족과 똘똘 뭉치며 살아야 한다며 가족만 바라보고 사셨다. 
내가 어릴 적 기억으로는 아침잠이 많은 우리들에게 천수경과 반야심경 독경을 강제로 자주 틀어 주셔서 듣다 보니 불교음악은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주 다니시는 절이 있었는데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잘 따라다니며 절에서 먹는 절 밥이 제일 맛있다 했고, 지금도 여전히 절 밥은 맛이 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건진 몰라도 불교에 대한 이해와 음식의 소중함도 일깨우며 밥 먹을 땐 감사의 인사도 중요함을 느꼈다. 
중학교 때는 친구와 함께 주말마다 하는 불교 법회에 참여하며 선·후배들과 절에서 하는 모든 행사가 즐거웠다. 또한, 스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나에겐 더더욱 좋았다. 부모님의 말씀보다 더없이 좋아서 1박 2일로 하는 행사에 참여하며 처음 외박을 하는 경험을 했다. 대광명이라는 법명까지 스님이 지어 주셨다. 사춘기 시절, 그땐 잠 못 이룰 정도로 가슴 벅찬 나날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난 그 법명이 좋다. 그렇게 마음이 복잡하면 나도 모르게 절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절을 했던 거 같다. 그렇게 절을 하고 나면 내 맘이 편하고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우리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시고 잠이 없으시다. 일찍 일어나시는 게 습관이 되어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쁘시다. 항상 부지런하시고 자식들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나이가 드실수록 어느 날부턴가 새벽에 운동을 나가시면 반나절은 운동하고 들어오실 정도로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리에 앉으시면 꾸벅꾸벅 조시고, 피곤하다는 말씀도 하셨고 머리가 아프시다는 얘기도 종종 듣긴 했지만, 그런 나는 별스럽게 생각하며 지나갔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남동생 네 가족이 항상 염려하며 지켜보기에 나는 별 신경을 안 쓰고 살았고 올케가 병원이 직장인 간호사여서 나의 손길보다는 작은 올케의 도움을 많이 받고 계셨다. 그런데 언제나 무심한 마음은 항상 모자라고 안 되었을 때 죄책감으로 찾아오는가 보다. 
병원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며칠 밤을 지샜다. 병실이 없어서 응급실에 며칠을 사셨다. 의식도 힘들고 가는 혈관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라 회복이 더뎠다. 병명은 뇌경색이었다. 평소엔 혈관에 피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머리도 아프고 자꾸 피곤했던 거다. 좁은 혈관을 약물로 투입해서 확장을 할 건지, 아님 수술을 할 건지 통보가 왔다. 수술하였을 때의 확률은 10% 정도로 사망할 수 있는 위험이 전재했고, 약물을 투입한 혈관 확장은 약도 독했지만 부작용도 심했다.  
가족들이 모여 이 위험한 상황을 지혜롭게 넘기길 기도하며 일단, 혈관 확장으로 좁아진 곳을 원활하게 넓혀주는 방법부터 시행해 보기로 했다. 관건은 통증으로 오는 아픔을 아버지가 잘 견뎌 이기도록 가족들의 힘이 필요했다. 열흘이 지나 아버지는 건강이 차츰 좋아지게 되면서 병실로 옮기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들과 조를 짜서 움직이는 동안 낮에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우리 남매들은 직장을 다니는 평일 저녁과 주말 등의 가능한 시간은 돌아가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시작했다. 
사고 당시 아버지는 쓰러지시면서 왼쪽을 못 쓰는 반신불수가 되셨다. 그렇게 활동적이셨던 아버지는 본인의 모습에 좌절하시며 매일 울면서, 화내시면서 지내는 날이 많으셨다. 그러면서 우울증까지 오게 되면서 견디기 힘들어하셨다. 
통증에 민감한 아버지는 조금만 아파도 밤이고 낮이고 고성방가로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쳤다. 이젠 다른 병실을 넘어 병원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싫어라 했다. 몇 달을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어머니와 가족들은 슬슬 지치기 시작했는지 눈만 마주치면 화를 내며 싸우는 날이 많았다.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모두가 힘들어 쓰러질 것 같아 무서웠다. 남편 몰래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아 속상했다. 정말 냉정하게 나라도 내 맘을 다 잡고 오늘부터라도 108배를 해 보겠다며 마음을 먹었다. 일주일만이라도 해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잘 안되었다. 무릎도 너무 아팠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회의스러웠다. 아니 내가 한심스러웠다. 며칠을 빈둥빈둥 머릿속으로만 맴돌고 시작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버지를 보고 오는 날은 정말 잘해보자고 맘을 먹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실행못하는 내가 정말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나서 남편이 산을 내려오다가 다리를 접질러서 반 기부스를 하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다리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남편이 몸져눕기라도 하면 그다음은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아찔했다. 정말 감사했고 순간 모든 일에 감사함을 느꼈다. 아버지도 이만한 게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감사함을 생각하며 108배를 나눠서 며칠이 걸리더라도 목표를 108배를 해보겠다는 의지로 다시 시작해 보았다. 
시작한 첫날은 30번 절을 하고, 그 다음날엔 50번, 그렇게 조금씩 나눠서 해보았더니 삼일이면 끝이 났다. 기분이 오묘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번엔 반야심경을 틀어 놓고 머릿속엔 남편과 아버지를 그리며 정신을 집중하여 절을 하였다. 아무 생각이 없이 아픈 줄도 모르게 집중하였다. 이렇게 경험을 하고 보니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불끈 불끈 솟았다. 눈앞의 힘듦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오로지 나의 아버지와 남편만을 생각하여야지... 하며 집중하고 싶었다.
가족들 모두가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어머니를 케어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었다. 그래서 주위에선 돌보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며 간병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남매들이 조금씩 모아 둔 돈으로 저녁에만 간병인을 썼다. 근데, 별난 아버지 성격에 일주일이 멀다하여 간병인이 바뀌었다.  
정말 다들 지쳐갔다. 아버지가 미웠다. 아프면 떼쓰고 싫으면 하기 싫다고 소리 지르시는 우리 아버지가 정말 싫고 미웠다. 왜 이렇게 가족들을 못 살게 구는지……. 정말 어린아이가 되셨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를 쉬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마저 몸져 누우시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였다. 다행히 간병인이 오고부터 어머니도 여유가 생기셨는지 웃는 모습을 보여주시며 아버지와의 옛날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많아졌다. 아버지 병이 호전되고 가족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집중했다. 일부러 밖에 모시고 나가 맛있는 거 사드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버지와의 시간을 조금 느슨하게 하며 시간차를 두고 하루하루를 지내었다. 
병원에서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 갈 때 쯤 아버지는 병원이 싫다시며 퇴원을 원하셨다. 또 어린아이처럼 식사도 안하시고 모든 것이 투정만 부리셨다. 여러 가지 약물과 방법을 거쳐 최종 의사의 퇴원 확정이 나왔다. 
집에서 해야 할 숙제들도 거듭 확인하고 통원을 목적으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이때 아버지는 옆에 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셨다. 밥도 혼자 못 드시고 소변, 대변을 못 가리시는 기저귀를 차고 다니셔야 한다. 아버지가 장애 1급 판정을 받던 날, 나는 미친 듯이 눈물을 흘렀다. 
집으로 주간보호사가 오고 사람이 여러 번 바뀌긴 했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이젠 사랑스럽다. 아니 자랑스럽다. 힘든 고통도 잘 이겨내 주시고 앞으로도 잘 극복해 나갈 거라고 믿고 싶다.
요즘 아버지는 통원 물리치료를 받고 침도 맞으러 다니시며 성격도 밝아지셨다. 어머니와 젊은 시절을 생각하며 미워했던 날들보다 지금 도란도란 얘기 나누시는 모습은 우리 자식들에겐 더없이 큰 행복이다. 
여전히 우리 부모님은 투닥투닥 다투시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감사함을 느낀다. 살아계심에 고마움을 느끼고 소중함을 깨달아 간다. 내가 행복해야 부모님도 가족들 모두가 행복함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나로서 살아갈 때 감사함을 알아가듯 말이다. 가족들과 서로 도와가며 힘든 시기를 지혜롭게 잘 이겨낸 내 자신에게도 고마움을 느꼈다.
오늘도 합장을 하고 향 하나를 꽂아 감사의 절을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추정자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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