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53) - 10가지 위빠사나의 지혜 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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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53) - 10가지 위빠사나의 지혜 Ⅶ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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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조건과 순간의 두 가지로 법들(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生·滅]을 수관하면 ‘조건 따라 일어난 법들[五蘊]은 소멸하는구나[集法卽滅法], 앞서 일어나지 않았던 법들이 새롭게 일어나는구나.’라고 각인됩니다.  
‘ 「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에 의하면 석존께서 깨닫기 전의 보살(bodhisatta) 이었을 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 지워진 법을 연기의 12요소로 압축시키고, 12요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면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2연기의 요소들을 하나하나씩 순관順觀하는 것(12연기의 유전문)은 현상의 일어난 원인을 보는 것과 같고, 그 12요소들을 하나하나씩 역관逆觀하는 것(12연기의 환멸문)은 현상의 사라진 원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몸[色蘊]이 ‘깔라파’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도 8∼10 깔라파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건 따라 생긴 것임을 알고 볼 때 몸이 견고하다는 미혹이 부서지면서 진정한 본성인 무아의 특성(an-atta-lakkhana)이 드러납니다.
상카라(sańkhārā : 受·想을 제외한 50가지 마음부수들)의 무더기는 뭉뚱그려 보면 단단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찰지의 도끼로 쪼개면 속이 텅 빈 실체가 없는 파초와 같습니다. 파초의 줄기는 겉모양은 마치 시멘트로 만든 튼튼한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튼튼한 듯 보이는 기둥의 속[心材]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좌선을 마무리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읊조리면서 반조해 봅니다.
“물질은 천천히 멸하고 무겁게 일어난다. 마음은 신속하게 멸하고 가볍게 일어난다. 마음은 일어나는 순간과 머무는 순간과 멸하는 순간이 모두 같다. 물질은 일어나는 순간과 멸하는 순간에만 빠른 것이 마음의 순간과 같다. 다만 머무는 순간만 길어서 16개의 마음들이 일어나고 멸하는 만큼 길다. 법들은 항상 새롭게 일어나 번개 불처럼 나타난다. 잠시만 머문다. 마치 태양이 떠오를 때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 위에 그은 선처럼. 또 이 법들(번뇌)은 고갱이가 없이 나타난다[如夢幻泡影].”라고. 
이런 수행 단계를 마스터하면 초보적인 위빠사나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가볍고, 부드럽고, 일에 적합함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면전에 광명(obhāsa 오바-싸)이 일어나면서 ‘나는 도와 과에 이르렀다.’라고 여기면서 명상주제를 놓아버리고 광명을 즐기고 앉아 있습니다. 
저 자신도 수행 중에 이와 같은 황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이런 마음 상태는 광명에 대한 사견과 자만과 갈애에 의한 세 가지 움켜쥠이라고 보고, 반드시 극복해야할 위빠사나의 결함(upakkilesa 우빡낄레사) 또는 경계라고 말합니다.  
이 위빠사나 경계는 진리를 통찰함에 이른 성스러운 제자와 그릇되게 수행하는 자와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고, 대다수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말해집니다.
어떻게 세 가지의 거머쥠을 풀 것인가? 옛 스승들은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고 빛바래기 마련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하고 가르칩니다.
물질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부서진다는 뜻에서 무상하고, 두렵다는 뜻에서 괴로움이며, 고갱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라고 관찰한다. 물질을 대상으로 가진 그 마음도 뒤따라 일어난 통찰지 마음으로 ‘무상·고·무아’라고 관찰합니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마음은 무상하고, 느낌은 고통스럽고, 일체 법들은 무아이고, 몸은 부정함”에도 마음은 영생永生하고 느낌은 즐겁고 일체 법들에는 자아가 있고 몸은 깨끗한 것으로[常·樂·我·淨] 여기고 있습니다. 저 역시 수행하기 전에는 이와 같은 화석화 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를 두고 ‘인식의 전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반야심경』 에서는 이러한 전도를 여의고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을 실현한 것[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상함을 수관하면 영원하다는 인식이, 괴로움을 수관하면 행복하다는 인식이, 무아[공]을 수관하면 자아가 있다는 인식이 무너지고 마치 신기루를 보듯 이 세상을 보는 법안이 열릴 것입니다.   
이 ‘무상·고·무아’인 법들은 즐길만하지 않고 탐할 필요도 없다는 바른 인식이 생겨나 역겨워하고 즐기지 않으며 오로지 소멸만을 마음에 잡도리하게 됩니다. 과거의 상카라들은 소멸됐고, 무너진 상카라들은 어디에도 축적되지 않으며, (현상의 경험에 의지하여 추론함으로써) 현재의 상카라들도 소멸되고, 미래의 상카라들도 소멸될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내생에 어떤 존재로,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오온, 12처, 18계의 범주 내에는 피난처, 안식처, 귀의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행로가 ‘법귀의 ․ 법등명’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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