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득 스님의 49재 법문 - 본무생사(本無生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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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 스님의 49재 법문 - 본무생사(本無生死)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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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본원에서 시작해서
본원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불교를 신앙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과학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심리학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철학이라고 합니다. 모두 맞습니다. 신앙의 특징은 요지了知,즉 처음과 끝을 말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관한 것이죠. 여기에 관해서 불교는 본원本源에서 시작해서 본원本源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본원이 우리의 마음이며 그래서 우리 각자는 창조주임과 동시에 피조물인 것입니다.
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불교에는 중관학中觀學이 있습니다. 공(중도)의 이치를 밝혀 놓은 것인데요, 현대의 양자물리학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양자의 진행 방향은 사람의 의도에 간섭을 받으며 그에 따라 사물이나 상황은 달라진다고 합니다. 금강경의 무유정법無有定法 시명是名 아뇩다라샴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말과 통하지요.
철학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이에 해당되는데요, 불교에는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이미 이 방식을 쓰고 있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최고의 심리학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바로 유식학唯識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르고 있지만 불교의 핵심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할 때도 똑같이 그(아끼고 사랑하던) 마음을 가지고 씁니다. 어디에 이 마음 저 마음이 따로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쓰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천수경을 독송했지요? 천수경에서는 ‘이것은 해라. 저것은 하지 마라.’ 하지만 그게 다 마음을 잘 써서 편안하게 하는 방편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어떤 경을 보면 나쁜 것, 좋은 것이 따로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실상은 좋은 것 나쁜 것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뿐입니다. 그런 의미가 일주문에 있는 거죠. 하지만 하나라고 하면 또 하나라는 것이 있나보다 하고 하나에 집착을 하는 게 보통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시 불이문不二門이라는 문을 세워 놓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라는 것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 ○영가의 사십구재입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둘이 아닌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삶과 죽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죽어가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가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있던 본래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불성이라 부르고, 부처라 부르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남방 불교에도 49재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우리처럼 이렇게 제사형식을 갖추고 의식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가족들이 스님들을 모시고 공양을 올리고, 스님들은 부처님을 대신해 법문을 하는 거죠. 지금 우리가 이렇게 형식을 갖추어서 의식을 하는 것은 우리의 깊은 의식 속에도 본원을 그리워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편이지만 재齋라는 의식을 통해서 본마음을 밝혀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형식과 절차를 다 떠나 불성이라고 하는 마음을 바로 보는 선禪도 있습니다. 
생명은 본래 영원담적靈源湛寂, 신령한 근원은 맑고도 고요하여 무고무금無古無今, 옛날과 지금이 없다 하였으니 묘체원명妙體圓明, 묘한 본체는 두렷이 밝은데 하생하사何生何死, 어떤 것을 태어남이라 하고 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겠습니까? 이것은 제가 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조금 전에 한 재 의례 게송에 다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49재와 상관없이도 본래 우리는 하나의 마음이며 두 마음이 아니라는 진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식을 행하는 가운데 조금 전에 영가를 위하여 손바닥만큼 지의紙衣를 태웠습니다. 이 옷은 크기와 쓰임이 자재해서 영가가 마음대로 입고 쓰고 신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영가는 몸을 벗어 모든 것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에 이렇게 풍부하게 차려놓은 이 음식들은 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많은 분들이 오셔서 공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맛있게 드시는 것이 바로 영가가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는 몸이 없으므로 오직 법식法食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제가 지금 풀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러한데도 스님들이 극락과 지옥을 논한다면 이는 미혹한 중생을 더더욱 어둡게 하는 것이며 필시 여러분을 기망하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지옥, 아귀, 축생은 다 관념입니다. 부처님도 환幻으로 오셨다가 환幻으로 법을 설하고 환幻으로 가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이 본무생사本無生死, 본래 나고 죽는 것이 없는 도리를 바르게 안다면 일부 스님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님들도 바로 섭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소림면벽지가풍少林面壁之家風/​ 니련하측泥蓮河側 곽시쌍부槨示雙趺/​총령도중葱嶺途中 수휴척리手携隻履, 달마대사의 9년 동안 면벽은 긴 시간이지만 거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뜻이나 달마대사 총령에서 짚신 한 짝 메고 간 도리가 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는 이제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누구의 형도 오빠도 아닙니다. 부처님과 같은 자리로 잘 갔다고 말씀드리며 이 재를 마칩니다.

/ 우득 스님 와우정사 주지 / 한라정토회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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