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6) - 도덕경 - “음/양이라는 두 대립면이 충돌하여 어떤 균형 상태를 이룬다”
상태바
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6) - 도덕경 - “음/양이라는 두 대립면이 충돌하여 어떤 균형 상태를 이룬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24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리학적 해석으로 보면 1은
만물을 낳는 핵심적인 중추가 된다
그러나 노자의 1은
다른 대립면을 모두 포괄한
보편으로서의 1이다

이 장은 읽기에 따라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 도가 일(一)을 생하게 했다는 것은 무(無)가 도(道)를 낳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무가 도를 낳았다는 인과론적이고 본체론적 해석보다는 도는 대립물들의 두 쌍이 서로 얽혀 순환하면서 존재를 형성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도가 일을 낳았다고 하니 혼란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이때 도는 모자(母子)관계처럼 일(一)을 발생시키다는 뜻이 아니라 도가 일이라는 관념을 이룬다는 의미로 일(一)속에 이미 이(二)와 삼(三)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객 미분의 무극 상태,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태극 상태가 나오고 이런 원초적 상태에서 양극으로의 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양극의 조화로운 상관관계에서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런 뜻에서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안았다고 할 것이다. 
만물이 음을 진 채 양을 품고 있는데, 두 기가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형식이 음/양이라는 두 대립면이 서로 충돌하여 어떤 균형 상태를 이룬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이라는 관념이 나오고 삼이라는 조화체가 나오며, 그 조화체들의 집합인 만물이 있게 된다. 즉 두 대립물인 음양의 조화에서 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송시대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태극이 움직여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았다고 보았다. 율곡 이이 또한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도덕경에 주석을 넣어 순언(醇言)이라는 책을 썼다. 순언에서는 42장이 1장이다. 주자학적으로 볼 때 1은 만물을 낳는 시원으로 본다. 
성리학은 정명(正名)을 바탕으로 바른 것과 바르게 않은 것을 나눈다. 이름은 시간과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체계, 구분, 이름을 바탕으로 변하는 것들이 나온다. 그래서 여기에 존재의 위계가 지워진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고, 변하는 것들은 그보다는 하위에 처해진다. 그러므로 성리학적 해석으로 보면 1은 만물을 낳는 핵심적인 중추가 된다. 그러나 노자의 1은 이것과는 달리 다른 대립면을 모두 포괄한 보편으로서의 1이다.
두 대립면의 조화는 왕에게도 이어져 도를 체득한 왕은 가장 높고 고귀한 존재이나 스스로를 비천한 존재인 고아, 과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고귀한 것은 비천한 것을 뿌리로 하고 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물은 덜어내려 해도 오히려 더해지고, 더하려 해도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이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로 묘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개방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나 역시도 가르치는 것이다. 노자는 유학자들의 이론 체계가 노자의 그것과 극명하게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 범위 안으로 들여와 자신의 가르침으로 삼는다. 이것은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개방적 태도라 할 것이다. 
진정 도를 갖춘 사람은 세상의 변화에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을 반대편으로 열어 놀 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정복당하거나 치욕을 당하기 쉽다. 굳세고 강한 자는 좋게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는다면 가이 장구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글·고은진 철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