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에 담긴 선취여행 ⑬ - “색·공의 이치 깨달아야 해탈 이룰 수 있어”
상태바
한시에 담긴 선취여행 ⑬ - “색·공의 이치 깨달아야 해탈 이룰 수 있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9.07 12: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허하고 허망함이 삼라만상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달아야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되고
질병이나 빈궁함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곽경립-시인, 수필가
곽경립-시인, 수필가

생명이 과거로부터 왔다면, 그 과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열반경涅槃經』권 14  「성행품聖行品」 에 보면 “일찍이 석가모니는 과거세(宿世)에 설산雪山에서 불도佛道를 수행하던 중 나찰羅刹을 만나 절반의 게송을 얻기 위해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生·노老·병病·사死의 고뇌, 그 고뇌를 끊어내기 위하여 석가모니도 끝없는 고행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고뇌가 깊었던 붓다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시자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제법諸法의 상常·무상無常에 관계없이 생生·노老·병病·사死의 고苦는 실재하므로 나는 그 제압을 설한다.”라고 죽음의 고뇌를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의 불사不死가 아닌 정신의 불사不死를 공간(제법무아諸法無我)과 시간상(제행무상諸行無常)에 일어나는 일체 현상이 실체가 아님을 명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윤회라는 고苦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해탈을 통하여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불자佛者라면 사성제四聖諦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 그렇습니다. 인생의 고뇌인 ‘생生·노老·병病·사死’에서 죽음은 모든 고苦의 중심에 있습니다. 끝없는 고苦의 윤회輪廻, 석가는 인도 바라문교의 사상인 윤회라는 업業을 벗기 위하여 열반涅槃을 말하고, 그 중심축에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라는 실천철학을 제시합니다. 석가모니 말씀에 대하여서는 이후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하나 풀어가기로 하고, 오늘은 인도의 재가불자在家佛者인『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마힐摩詰을 자신의 자字로 삼고 있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시불詩佛 왕유王維의 시를 감상하면서 그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풀어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 거사의 병환에 부치는 이 시를 학인들에게 보이다. 
與胡居士皆病寄此詩兼示學人:여호거사개병기차시겸시학인」    2수 중 1수
                                                                                        - 왕유王維 -

일순간 하찮은 망념에 쫓기다가
아침이슬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몸
일체 현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본다면
내 몸은 어디에 있고, 축생과 뭐가 다르리
제법이 실재라는 고집에 얽매이거나
공만 추구한다고 미망을 버릴 수 있나
마음을 씻는 것으로 어찌 苦를 벗어나리
깨달음의 과정에도 길을 잃고 헤매거늘
애착으로 인하여 병이 생기게 되고
탐욕 때문에 빈곤을 느끼게 되는 것
六境이 사람을 미망케 하는 것이 아니고
만상이 허실임을 진실로 깨달아야 하오
불법에 이르는 길 결국 무엇을 버려야 할지
각기 다른 萬象이 어찌 세상을 속되게 하리
호 거사는 그저 베개를 높이 베고 살아가니
고요한 삶 누가 함께 할 수나 있겠소
불도를 깨우쳐 衣食을 모색하지도 않고
선에 심취해 기쁘게 땔나무 지고 있으니
그대 아직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면
사람 사이 멀고 가까움을 어찌 말하겠소
一與微塵念 일여미진념
橫有朝露身 횡유조로신
如是覩陰界 여시도음계
何方置我人 아방치아인
礙有固爲主 애유고위주
趣空寧捨賓 취공녕사빈
洗心詎懸解 세심거현해
悟道正迷津 오도정미진
因愛果生病 인애과생병
從貪始覺貧 종탐시각빈
色聲非彼妄 색성비피망
浮幻卽吾眞 부환즉오진
四達竟何遣 사달경하견
萬殊安可塵 만수안가진
胡生但高枕 호생단고침
寂寞與誰鄰 적막여수린
戰勝不謀食 전승불모식
理齊甘負薪 리제감부신
子若未始異 자약미시이
詎論疏與親 거론소여친

작품 전체는 호 거사를 문병하는 것이지만, 왕유는 첫 줄부터 ‘인신의 허망함人身虛妄’을 말합니다. 불교적 관점으로 ‘생生·노老·병病·사死’의 고뇌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어서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 일체 현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면, 내 몸은 어디에 있고, 나와 축생畜生이 뭐가 다르냐고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슬쩍 꺼내놓고는 다시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물이 실재한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보이는 것은 모두 실체가 아님을 애써 추구하면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구요? 깨달음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미로迷路로 인해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시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諸法)이 있음도 아니고(非有) 없음도 아니(非無)라는 불가佛家의 인식 과정인 ‘색·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또 문병의 취지에 맞춰, 질병은 애착에서 비롯되고, 지나친 욕심이 일어나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단지 있고(有) 없음(無)의 분별심(六境)만으로는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공허하고 허망함이 삼라만상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달아야만,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게 되고 질병이나 빈궁함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호 거사는 이미 ‘색·공의 이치’에 통달하여 부귀공명의 욕망을 떨쳐내어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불도佛道를 즐기며(安貧樂道) 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인정의 멀고 가까움을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호 거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가불자로 시인과는 불교의 이치를 함께 논할 수 있는 가까운 사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諦는 산스크리트어 사트야(satya)로  ‘존재하다(아스as)’라는 동사의 현재분사인 사트(sat)에서 유래하며,  ‘진실’ 을 뜻한다. 한자의 諦 역시 진리의 뜻으로 원래는  ‘밝힌다’ 라는 뜻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