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가는길 - 월정사 - “도심 속 오름 품어 안은 문화재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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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가는길 - 월정사 - “도심 속 오름 품어 안은 문화재 전통사찰”
  • 임관표 기자
  • 승인 2022.09.2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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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경내에 수양버들 매화꽃이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월정사 경내에 수양버들 매화꽃이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법구경에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말씀을 노래하며 한라산 줄기가 뻗어 열안지 오름으로 내려와 옛 선비들이 방선문을 찾아 풍류를 읊고 민오름과 광이오름을 품고 있는 1934년에 창건하고 2001년 10월 25일 전통사찰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자료 제4-1호 이조(석조)여래좌상과 문화재자료 제4-2호인 목조보살입상을 소장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월정사를 찾았다.
월정사의 역사를 살펴보자. 제주 4·3사건 당시에는 제주도민과 함께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기도 한 월정사는 1934년 음력 4월 8일 김석윤 스님이 제주 포교소 월정암을 창건하면서 월정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월정사 자리는 1871년 무렵 토굴을 마련하고 수행하던 승려가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1938년 10월 1일자  『불교시보』 를 보면, 월정사에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 제1지방 분원이 마련되어 제주 최초의 선원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이 제주 선원은 1940년대까지 존속했으며 참여한 승려들의 수는 10명 이내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된 후 1948년에는 제주 4·3사건으로 사찰이 전소되고 승려들이 희생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몇몇 승려들의 노력으로 월정사 터에 7평가량의 난민 보건 주택을 짓고 법당으로 사용하면서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월정사가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지문 스님(월정사 주지)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가 신축되면서부터다. 이후 계속된 불사에 힘입어 2001년 10월 25일에는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고 디지털 제주문화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에 보면 공적비와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만오 양항모 스님과 거사 김찬수께서 월정사 대지 천여평과 오라리밭 천오백평을 시주하신 공덕을 영원히 기리고자 신도들이 뜻을 모아 공덕비를 세우고, 월정사 매화 향기가 봄을 불러오듯 한라산 정기가 오롯이 서려 있는 이곳에서 지문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의 싹을 틔우셨다. 1973년 11월 24일 삼십만 원에 인수할 때 쌀 석 되, 보리쌀 두 말, 조그만 법당과 요사채만이 있었다. 4·3 당시 난민주택 14가옥을 대지 2,000여 평을 구입한 후 이주시키고, 교회와 목사 관사를 사들여 대웅전, 극락보전, 범종각, 요사채, 일주문, 담장 등을 조성함으로써 오늘의 월정사의 위용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포교를 위해 교도소 7년 법회, 천일기도, 50척 약사여래와 천불 봉안 등 전력을 다하셨다고 공적비에 쓰여있다. 함경자 보살과 현익준 거사가 개인이 소장하던 목조보살입상과 이조(석조)여래좌상을 주지 스님에게 넘겨받아 20년 동안 소장하고 있다가 2000년 12월 27일 제주도 문화재 자료 제4호 등록되도록 하여 2001년 10월 25일 문화재 사찰로 지정받았다.

문화재 자료 제4-1호 이조(석조)여래좌상
문화재 자료 제4-1호 이조(석조)여래좌상

월정사 소장 문화재에 대하여 문화재청 기록을 살펴보면 아름다움을 전하는 문화재자료 제4-1호 이조(석조)여래좌상은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가 59cm에 달한다. 몸체에 비해 큰 머리를 갖고 있으며, 상체가 낮으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등 조선 후기 특징이 보이는 불상이다. 머리는 곱슬곱슬한 나발(螺髮)이며, 머리 위로는 상투와 같이 우뚝 튀어난, 즉 육계(肉髻)가 높이 솟아 있다. 머리와 육계 사이에는 반달모양의 계주(髻珠), 즉 장식물이 있으며 얼굴은 정방형의 형태로 정면을 응시하면서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옷 모양새는 양어깨를 모두 가리고 있으며, 가슴 이하의 복부를 가려주는 승기지(僧祇支)와 대의(大衣)를 입고 있다. 승기지는 가슴 아래에서 묶어 고정시켰는데, 매듭은 표현되지 않고 가슴에서 가로로 걸쳐 두꺼운 띠로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왼손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걸쳐 놓았다고 나와 있다.

문화재 자료 제4-2호 목조보살입상
문화재 자료 제4-2호 목조보살입상

문화재자료 제 4-2호인 목조보살입상은 본존 좌우 협시보살 중 좌측 관음보살상만 지정된 것이며, 우측 대세지보살은 후대에 조성한 상으로서, 불상은 높이가 78.5cm인데, 보관을 제외하면 향나무로 몸체 전체를 조각했다. 머리에는 장식이 화려한 보관을 썼다. 보관 중앙에는 화불(化佛)이 있고, 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 이로써 이 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임이 드러난다. 얼굴은 둥근 형태이며, 가늘고 길게 그어진 눈과 붉은 칠을 한 입가에는 자비로운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다. 옷은 가볍고 하늘 하늘거리는 천의(天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을 가린 승기지(僧祇支)의 띠 매듭이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목, 어깨, 다리 등에는 목걸이와 같은 영락 장식을 함으로써 보살상의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양쪽 손목에는 염주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으며 두 손으로 연꽃 줄기를 들고 있다. 온화한 미소와 화려한 장식이 조화로운 보살상이라고 나와 있다.
월정사의 봄은 고고한 수양매화꽃이 탐방객들을 반기고 대웅전과 그 앞에 금강탑, 반야탑이 우뚝 서 있으면서 불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유형문화재 불상과 약사대불이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사바세계를 바라보며 불사리탑과 조화를 이룬다. 
월정사 주변을 둘러보자. 선비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읊었던 방선문 계곡, 민오름, 광이오름, 한라수목원, 신비의 도로에서 잠시 차 한잔하며 문화재 불상 친견 법회가 열리길 발원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월정사 대웅전가
월정사 대웅전가
월정사 극락보전
월정사 극락보전
월정사 극락보전
월정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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