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당시 불타버린 사찰에 대한 배·보상 문제 다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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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불타버린 사찰에 대한 배·보상 문제 다뤄져야”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2.09.2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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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성보문화원·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공동 주최
지난 6일 제주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두 번째 열려
지난 6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지난 6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에서 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구암 성천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에서 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구암 성천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탐라성보문화원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4·3 피해 증언마당이 지난 6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제주도내 기관단체장과 도 관계관, 도의회 길상회 의원, 사찰신도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주불교 4·3 피해 증언마당에서 사)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구암 성천 스님은 “지금의 제주불교는 제주불교 인물들의 노력과 희생이 바탕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함의 자리이자 증언자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면서 “제주불교 4·3의 피해가 오늘을 계기로 화두로 꽃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 당시 불타버린 사찰 피해에 대한 배·보상 문제도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이서 환영사에서 제주특별자치도의회 4·3특별위원회 한 권 위원장은 “4·3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제주불교는 스님들의 총살과 수장 등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사찰 전소, 불상 및 탱화 훼손 등 갖은 수난을 겪었음에도 그동안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기억 세대의 노령화로 당시 피해에 대한 증언과 기록조차 녹록치않은 실정”이라며 “오늘 증언마당을 통해서 제주 현안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제주불교의 높은 뜻이 알려지고 불교계의 진상규명에 대한 논의가 확장되기를 기대한다”는 환영사를 전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교구장 제주불교연합회장 무소 허운 스님은 “4·3피해 증언마당은 역사적 아픔을 재조명하는 길”이라면서 “제주 4·3은 제주인과 불자들이 눈물과 한의 역사요 억압과 수난의 역사로 사찰들도 거의 전소되거나 파괴되었고, 스님들도 16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아픔을 겪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한 “인권과 평화의 정신은 불교의 상생 정신과 어우러져 지속적인 증언 마당을 통해 교육의 장으로 상처와 갈등의 역사를 접고 불교의 힘 있는 사상에서 모든 존재가 쉼과 성찰에 게으르지 않게 시대를 적시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 사부대중이 간절한 동참을 기대한다”고 축사를 전했다.     

                     

“부처님 등에 짊어지고 피신하게 되었고 부악사는 불 질러져”

1948년 10월 20일 해안선에서 5㎞ 이상 통행금지 포고
부악사 위세 꺾이면서 토벌대에 의해 폐사에 이르게 돼
1954년 낙천에 기원사 창간뒤 다시 부악사 중건에 나서
부악사에서 영축사로 개명 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이 제주불교 4·3증언마당에서 증언하고 있다.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이 제주불교 4·3증언마당에서 증언하고 있다.

이날 4·3피해 증언마당은 개회식에 이어서 곧바로 김진희 사)탐라성보문화원 기획국장의 진행으로 제주불교 4·3 피해 공개증언마당으로 어어졌다. 이날 첫 번째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의 증언이 있었다.
광수 스님의 증언은 4·3 당시 10살 때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한경면 청수리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고 하여 부악사(釜岳寺)라 불렀다. 경호 스님에 이어 2대 주지로 월봉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서 대교과를 수료 후 부악사에 감원으로 발령받는다. 통천사 김화표 스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4·3이 발발하기 이전이었다고 월봉 스님의 상좌였던 광수 영암 스님은 부악사에 대해 기억해냈다.
“청수리의 인근 낙천이 제 고향입니다. 당시 제가 10살 무렵이었는데, 어머니 따라 부악사에 동지기도를 따라갔어요. 당시 부악사 위세가 당당했습니다. 사천왕상이 그려진 일주문에 요사채 그리고 대웅전이 모두 기와였어요. 저지와 청수는 물론 월림, 영락, 무릉에서까지 신도들이 기도처로 삼았기에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최대의 아픔은 1948년 4·3이 발발했고, 그해 10월 20일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의 지점과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가호 총살하라’라고 포고하게 된다. 이에 부악사의 위세도 하루아침에 꺾이고 만다. 당시 월봉 스님의 속가 친동생이 저지파출소장으로 근무할 무렵이었다. 동생은 하루빨리 해안마을로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고, 시급함을 알게 된 스님은 모셨던 부처님(목조여래좌상)을 등에 짊어지고 판포 통천사로 피신하게 이른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스님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토벌대에 의해 위풍당당했던 부악사는 불 질러졌고, 폐사하기에 이른다. 
그 흔적은 옛 기와만이 흩어져 그 당시의 위용을 증명할 뿐이다. 부악사가 폐사됨에 따라 월봉 스님은 이곳저곳 사찰의 기도 스님으로 있다가 당시 모슬포 대승사 주지 비구니 스님이 입적하면서 대승사에 주지로 주석하게 된다. 그 무렵 광수 영암 스님은 이름 모를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월봉 스님은 침과 탕약에 능하셨는데, 광수 영암 스님의 모친은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낙천에 월봉 스님을 모시게 된다. 삼주 동안 매일같이 탕약을 끓여 결국 기적적으로 광수 영암 스님은 새생명을 얻는다.
그 후 광수 영암 스님의 어머니 제안으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부처님을 봉안하자는데 마을 유지들이 뜻을 같이하면서 1954년 낙천에 ‘기원사’가 창건된다. 기원사에는 4·3으로 어쩔 수 없이 통천사에 모셨던 불상을 다시 기원사로 이운해 봉안하여 이 지역의 불법 홍포 메카로 삼게 된다.
“당시 한창 4·3재건으로 이동도 자유롭지 않았고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버려 자신의 집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불자들은 자기 집은 못 짓더라도 기원사를 짓는 데는 모두가 동참을 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어 가면서 부악사를 중건해야 한다는 신도들의 의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당시 관음회가 조직되었고, 당시 전소된 부악사 부지는 150평으로 협소했는데, 크게 중창을 염두하고 현 영축사 부지를 매입하게 됩니다. 1961년 임인년 오두막을 지은 데 이어 1964년 을사년 초가 대웅전과 종각을 갖추고 기원사의 불상을 다시 모셔오면서 여법한 옛 명성을 이으면서 다시금 불법이 피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불사를 중창한 만큼 부악사에서 사명을 개명, 영축사라 명명했다. 그 이유는 가마봉 인근에 큰 암석이 하나 있는데, 그 인도 영축산에 있는 독수리 모습을 닮았다 하여 ‘영축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증언 마당을 마치고는 사회 김진희 국장이 “4·3이 어떻게 기억돼야 하는지에 대한 질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광수 영암 스님은 “평화와 인권이 일깨워준 4·3이었으며, 제주불교 역사의 생생하게 남기고 있다”고 전했다. 
사)탐라성보문화원이 개최한 제주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두 번째 순서는 선광사 주지 춘곡 수열 스님의 증언마당은 다음 호에 게재한다.

제주불교4·3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과 선광사 주지 춘곡 수열 스님
제주불교4·3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과 선광사 주지 춘곡 수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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