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 - "매미 울음소리에 옛 스승을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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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 - "매미 울음소리에 옛 스승을 그리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9.2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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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스님의 법문 가운데
부정한 재물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꿀을 칠한 비수와 같다는
경책은 지금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진장 스님
무진장 스님

처서가 지나자 산과 들에 산소를 찾아 벌초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과원의 수풀 속에서 소슬한 바람결에 묻어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늘 이맘때면 서늘한 아침 시간에 과수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닙니다.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 마치 삿갓을 쓴 것처럼 과수의 광합성 작용을 방해하는 환삼덩굴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뭇가지나 잎사귀에 딱 달라붙은 매매허물蟬退이 여기저기 눈에 자주 보입니다. 아마도 지난여름 과원에서 “맴 맴, 찌∼르르르” 요란하게 울어대던 매미들일 것입니다.   
여름만 되면 어디를 가나 매매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도심의 아파트 방충망에 달라붙어서 울기도 하지만 매미는 예부터 우리 인간들과는 매우 친숙해서 해충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6~7년 정도를 꼬박 땅속에서 애벌레로 견디다가 여름 어느 날 땅 위로 올라와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펼치며 매미가 되는 모습 때문에 불교에서는 ‘해탈’의 상징이라 표현하거나, 혹은 지상에 나와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무소유’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왕이 쓴 관모가 익선관翼蟬冠이었던 점, 육조의 대신들의 관모에도 매미 날개 모양의 뿔이 달려 있었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의 군신들은 매미가 ‘문文·청淸·렴廉·검儉·신信’이라는 다섯 가지의 덕을 상징한다고 칭송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우는 매매 소리를 들으면서 여백공呂伯恭의 높은 인격을 그렸고, 퇴계 이황은 여름날 나무 그늘에서 매매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자와 여백공 두 분 선생의 풍모를 그리워하곤 했답니다. 
그런 까닭에 나뭇가지에 가득한 매매 울음소리(蟬聲滿樹)는 이심전심으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그리움의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합니다. 그 대상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스승들 가운데, 무진장 스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2013년 9월 9일 82세의 세납으로 원적에 든 스님은 58년의 법납 중에서 46년의 긴 시간동안 서울 종로 조계사에 주석하셨습니다. 
스님은 예비 법조인들과 인연이 매우 깊습니다. 판·검사의 교육기관인 사법연수원에는 다수의 종교 단체 모임이 있는데, 자율적으로 신행을 통해 친목을 다지고 참 사람됨을 닦아왔습니다. 
저는 1986∼87년경 재가불자 모임의 대표로서 선배의 조언에 따라 조계종 포교원장으로 계시던 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셔 여러 차례 법문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의 법문 가운데 “부정한 재물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꿀을 칠한 비수와 같다.”는 경책은 지금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후 스님과의 인연이 이어져 스님께서 번역한 《오늘은 사는 지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실린 ‘중도의 마음’이라는 글에 ‘출리’라는 글자가 있어서 눈여겨보았다가 나 홀로 수행공간을 만들면서 ‘출리산방’으로 작명하게 되었습니다. 
‘무진장’의 법명은 동산 스님이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출가 전에 스님은 17세 때 학도의용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나라를 지키다가 살아 돌아온 후 삶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현대 한국불교의 거목이시던 범어사의 동산 대종사를  은사로 하여 1956년 출가하여 1960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이 밥이라면서 그 외의 다른 것은 꼭 필요한 것(옷 세 벌)을 제외하고는 소유하지 않아서 ‘칠무七無 스님’이라는 별호를 얻었듯이 겨울에도 모자, 목도리, 장갑, 솜옷의 내복을 걸치지 않았고, 또한 평생 동안 돈 지갑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가용 승용차도 갖지 않고 오직 대중교통만을 이용하였고, 자기 절조차도 없이 평생 동안 조계사의 절 방 하나로 소욕지족의 두타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계종 원로의장을 역임한 밀운 스님은 아무리 꺼내어 써도 다함이 없는 풍요로움이 끊이지 않는 보배창고, 즉 무진장에 비유하면서 이름값을 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진장 스님은 법문을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태국과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쌓은 해박한 지식에 기초하여 설법과 포교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후학들은 스님을 흔히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설법제일인 부르나 존자에 비견합니다.
무진장이란 말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우리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두고 ‘그 사람 돈 무진장하다’라고 하거나, 물이 엄청 깊을 때 ‘물이 무진장 깊다’라고 하는 등으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두고 무진장이라 표현합니다.
전라북도의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 지역의 앞말을 따서 ‘무진장 지역’이라 불려왔고, 무진장 세일이나 무진장 유튜브 등에서는 젊은이의 마음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또한 음식점, 패션, 화장품 등의 상호에 ‘무진장’이 붙여 있어 상술에도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무진장은 참 그리운 이름입니다. 법정 스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운 이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제주시 애월읍 반야사(주지 수상 스님)에서 지난 8월 31일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무진장 대종사 추모 다례재(9기)가 열렸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恒山 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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