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8) -도덕경 -“감각의 모든 것을 닫고 마음을 비우면서 자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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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8) -도덕경 -“감각의 모든 것을 닫고 마음을 비우면서 자조하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0.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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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차이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아는 자는 자기가 아는 내용을 언어화하지 않는다. 언어화한다는 말은 명제화 혹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연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앎을 정의 내리고 체계화하고 개념화라는 사람은 관계와 변화 속에 있는 자연을 정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진상과 언어적 체계는 맞지 않는다. 
감각과 입으로 말하는 모든 기관의 통로를 막고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면 마음은 외물에 의해 감각적 자극을 덜 받고 덜 끄달리게 된다. 외물에 대해 집착하게 되면 감각은 그 집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논리화한다. 그 논리가 이른바 소유의 지성이다. 그래서 노자는 감각의 모든 것을 닫고 마음을 비우면서 자조(自照)하라는 것이다. 
각각의 만물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 경계를 갖고 있으며, 이 독자적 경계에 각기 다른 개성을 이룬다. 학은 학의 개성이 있고, 오리는 오리의 개성이 있다. 만약 학을 오리에 맞춰 다리를 자르라고 한다면 이는 개성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만물은 자신의 본성에 이끌려 나고, 생장한다. 문제는 자신의 개성을 진리라고 여겨 타인에게까지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타인 역시 자신의 앎을 진리라고 여겨, 쌍방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예(銳)이다. 어떤 대상을 찰나적으로 드러내거나 포착하는 능력을 우리는 예리하다고 한다. 각각의 만물들이 첨예하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전체 조화가 깨져 혼란이 초래된다. 자신의 개성을 높일수록 그 날카로움은 극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수록 다른 것과의 차이가 분명해지고 조화는 깨지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에 이 세계는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날카로움은 꺾고, 그 빛은 조화시키고, 세속과 같아지는 것이다. 빛 또한 대상과의 차이를 드러내고 세상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도의 모습은 자신을 특정한 본질로 채워서 다른 것들과 극명하게 구분시키거나 자신을 특정한 체계로 수행하는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반대편 것들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을 스며들게 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어떤 특정한 본질이나 체계를 근거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에는 친숙하게 대하고 어떤 것에는 소원하게 대해야 한다는 구분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이로운지 아니면 해로운지는 특정한 기준 아래서만 결정될 수 있다. 이처럼 도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차이를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빛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는 속세에서 차별이 드러나지 않도록 처신한다. 이러한 것이 묘한 같음, 현동(玄同)으로 친하면서도 멀리하고, 소원하면서도 가깝고, 이롭지도, 해롭지도, 귀하지도 천하지도 않은 상태가 된다. 
회남자 「설산훈」에는 아름다움을 구하면 아름다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으면 아름다워지며, 추함을 구하면 추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추함을 구하지 않으면 추해지니 아름다움을 구하지도 않고 추함을 구하지도 않아서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는 것을 현동이라 하였다. 
현동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의 만물들은 모두가 하나이다. 각각의 만물들이 모두 도(道)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친함과 소원함, 이로움과 해로움, 귀함과 천함이 없게 된다. 현동의 입장을 가지게 되면 대립적으로 구분된 어느 한 쪽을 분명히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고귀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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