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 - 간경·간화,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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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 - 간경·간화, “뭣이 중헌디?”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1.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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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사천 법문 줄이면 37보리분법이고
이를 다시 줄이면 팔정도이고
팔정도 또 다시 줄이면 계정혜 삼학이고
계정혜 압축하면 불방일 하나로

우리들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관계를 맺습니다. 부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 사제의 관계, 벗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 등 온갖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 관계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축적된 성향이나 습기에 따라 ‘끼리끼리’ 만나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불선 수행하는 모임도 있고, 밀교의 만트라 주송에 열중하는 모임도 있고, 3000배와 아비라 기도를 하는 모임도 있고, 간화선 수행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1990년대에 위빠사나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이후로 들불처럼 번지면서 기존의 수행론인 간화선과 자주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양자의 이동異同 점을 찾거나, 혹은 양자를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학설들이 그러합니다.
세계의 불교학자들은 불교 2,600년사의 흐름을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반야중관/유식(유가행)/여래장/정토/밀교/선불교의 여덟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를 노거수에 비유하면 초기불교는 나무의 뿌리이고 아비담마는 그 밑줄기에 해당하고,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중국 선종은 각각 가지나 잎이나 열매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경은 길이고, 여래는 길을 안내하는 자일뿐입니다. 초기 경에는 불교의 기본 교학이 되는 5온·12처·18계의 법, 그리고 4성제와 12연기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조석으로 독경하는  「반야심경」 에도 기본교학은 온蘊·처處·계界·제諦·연緣의 다섯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교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보리분법을 수행할 때 열반은 실현된다는 게 초기불전의 일관된 흐름입니다. 
나에게 불방일(不放逸, 아빠마다, Appamāda) 을 일깨워준  「대념처경(M22)」 에는 네 가지의 명상주제로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을 제시합니다. 네 가지 명상 주제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대상으로 마음을 챙기고(사띠), 이 대상에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사마디), 이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반야)의 상호 관련성을 염(念, sati)·정(定, samādhi)·혜(慧, paňňā)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빨리어 경전에는 세존께서  아빠마다 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무려 197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후학들은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을 줄이면 37보리분법이고, 이를 다시 줄이면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또 다시 줄이면 계정혜 삼학이고, 계정혜를 압축하면 불방일(아빠마다) 하나라고 말합니다.
간화선에서 제일 강조하는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참선이 대혜 스님이 말한 혼침昏沈과 도거掉擧의 두 가지 선병禪病 극복에 있다면, 염·정·혜의 계발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조계총림 송광사의 방장이신 현봉 큰 스님은 “경전을 볼 때 여래의 진실한 뜻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 간경看經이며, 조사께서 말씀하신 어록을 보며 화자인 조사의 진실한 의도인 참뜻을 간파하는 것이 간화看話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일부 선불교에선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에 별도의 길(敎外別傳)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통찰 없는 선정이 무기無記의 공空에 빠지게 한다는 위험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를 배우지 않고, 이런저런 수행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소귀에 경 읽기’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못 붙잡으면 뱀에게 물린다.”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2016년 개봉작 영화 <곡성>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효진의 대사 중 “뭣이 중헌디?”가 강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뭣이 급하고 또 중한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유사정법이 난무할수록 우리는 더욱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법(dhamma)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我, atta]나 중생(satta)이나 영혼[壽者, jiva] 등의 개념적 존재를 법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셨습니다. 법들만 있고 중생도 존재도 자아도 실체도 조물주와 같은 지배자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공함[空性, suňňatā]을 밝히셨습니다.  
초기불전에서는 대승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법공[法空, dhamma-suňňat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거니와 법의 실유[法有]라고 말하지 않고, 오로지 법들은 조건 따라 일어난 것임[緣而生]을 강조합니다. 용수스님은 『중론송』에서 이러한 인연 소생인 법을 ‘공’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유위제법의 조건발생은 ‘찰나생·찰나멸’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문제이지, 유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보고 아는 법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림·김대규 화백
그림·김대규 화백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각각 무상·무원·공의 해탈을 실현하는 수행체계입니다. 그런데 간화선은 ‘법’이 아닌 ‘성품’을 직관하라고 합니다.
간화선에서 화두란 대승경전에서 자주 언급하는 불성 혹은 여래장에 대한 질문을 말합니다. 화두를 타파하여 ‘그 성품을 보면 곧 그대로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는 것이 그 수행론의 요체입니다.  
초기불전 어디에도 불성이나 여래장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윳따 니까야』 「사까무니 고따마 경」 (S12:10)에는 세존께서 12연기의 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발생구조[苦諦/集諦]를. 그 역관을 통해 소멸구조[滅諦/道諦]를 보아 정등각을 성취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12가지 존재의 바퀴에서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의 공함을 보기 때문에 ‘연기=무아=공=불성’은 문자만 다를 뿐, 같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라는 <승만경>의  표현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연기설에 배치되기 때문에 방편설의 입장에서 여래장, 불성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유학은 이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법구경』에 이르기를 “삶의 길에서 자기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을 찾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다.”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恒山 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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