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법문 -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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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스님 법문 -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1.2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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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다 해탈하고
모든 번뇌를 다 멸진(滅盡)시키는 가르침
무주당 청화 큰스님
무주당 청화 큰스님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그런 법어(法語)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衆生)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에 가리어서 실제적(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의 본 성품(本性品)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 중생이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고마문령(藁馬聞鈴)처럼 따라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門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暝想)을 하여 인연(因緣)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實相)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법 가운데서 참선(參禪)하는 법이 가장 최상승(最上乘)의 법이며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우리 불자(佛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신미(辛未)년 삼동(三冬) 결제(結制)를 즈음해서 최학도(最學道)를 공부하고자 많은 스님들이 모였고, 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최학도인 선(禪)에 대한 간절한 서원(誓願)으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비단 우리 불교(佛敎) 문중(門中)뿐만 아니라, 고도로 문명(文明)이 발달 된 오늘날의 세상에는 불교 외에도 많은 종교(宗敎)가 있고 또 종교 외에도 가지가지 수련법(修練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수련법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체계(體系)를 세워 놓고 각기 자기 수련법이 제일 수승(秀勝)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때에 이 참선법(參禪法)이 어째서 가장 수승한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우리 공부에 대한 바른 체계가 없으면 그냥 그쪽으로 따라가고 맙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추운 날씨에 이렇게 참여하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참선법이 가장 수승한 성불(成佛)의 지름길이고, 이른바 최학도(最學道)이며, 성불(成佛)의 정문(頂門)인 것을 아실 수 있도록, 아니면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라!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說法)을 하셨습니다. 45년 설도 있으나 49년 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그런 설법 가운데서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방편설(方便設)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年度)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12년 동안에는 우리 중생 차원(次元)에서 상식적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 그런 차원에서 하신법문(法門)이 초기(初期) 법문, 즉 초기 근본불교(根本佛敎)의 법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 만중생(萬衆生)의 본성품(本性品)과 현상(現象)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방편(方便) 법문(法門)을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문(法門)은 그 속에 모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 중생들은 그냥 문자(文字)나 말만 집착(執着)해서 부처님의 초기 경전을, 있다 없다 에 관해 말하고 또 일반 세간적(世間的)인 윤리(倫理), 도덕(道德)의 차원을 말하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기 법문은 우리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基督敎)나 유교(儒敎)나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惡)을 피하고 선(善)을 행하라든가,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한다든가 명상(暝想)을 조금 한다든가 하는 정도의 그런 법문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는 부처님이 금생(今生)에 나오신 뜻이 그냥 세간적(世間的)인 범주(範疇), 일반(一般) 윤리(倫理) 도덕적(道德的)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제법공(諸法空)의 공 도리(空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22년 반야설(般若設), 즉 49년 설법(說法) 가운데서 22년 동안이나 공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것인가?
우리는 그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原來) 공(空)이다, 국민학교부터 대학(大學)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관념(觀念)도 공(空)이다 라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무(虛無)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지혜(實相智慧)에서 볼  때에는 공(空)인 것입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大師)가 도(道)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증도가 가운데서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하고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실재(實在)하게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이 대천세계(大千世界),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든 세계가 텅텅 비어서 보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다, 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번뇌(煩惱) 해탈(解脫)을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다 해탈(解脫)하고 모든 번뇌(煩惱)를 다 멸진(滅盡)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삼계(三界)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번뇌에서 해탈해야 만이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고, 참다운 행복(幸福)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人間論)이고 또한 바로 행복론(幸福論)입니다. 본래적인 인간(人間)의 참다운 자기(自己)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最上)의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煩惱)에 구속(拘束)되어서 해탈(解脫)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自由)와 참다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衆生)의 본(本) 근성(根性)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空)이라는 그런 공 도리(空道理)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次元)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자기가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자기가 살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道德)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諸法空)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차원에서 위선(僞善)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參禪) 이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주만물(宇宙萬物)은 오로지 불심(佛心)뿐입니다. 
/ 정리·임관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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