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미륵에서 민중들의 숨결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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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돌미륵에서 민중들의 숨결 느껴져”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2.11.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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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성보문화원 제주불교 문화유산 답사
20일 ‘제주의 돌미륵 고치 알아보게 마씀’
흥룡사 석불~서천암지 돌미륵~영산암 미륵당
불교문화유산답사 참가자들이 무수천 광령 한 식당 정원에 자리하고 있는 돌미륵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불교문화유산답사 참가자들이 무수천 광령 한 식당 정원에 자리하고 있는 돌미륵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탐라성보문화원(이사장 구암 성천 스님) 은 지난 20일  『제주불교 문화유산 답사』   두 번째 길에 나섰다.
탐라성보문화원과 함께하는 돌미륵 이야기로 ‘제주의 돌미륵 고치 알아보게 마씀’이란 주제로 도내 불교신행단체장과 재가불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시 도평동 흥룡사 석불~제주시 광령 서천암지 돌미륵~산방산 영산암 미륵당으로 이어지는 답사길에 나섰다.
일요일 아침부터 늦가을 비가 오전 내내 내리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안전을 우선하면서 조심스럽게 출발했다. 광령 무수천 서천암 돌미륵이 자리한 곳에서 사)탐라성보문화원 강규진 원장은 인사말에서 “굳은 날씨에도 재가불자님들과 일반인들이 많이 참가해주셔서 감사를 드리며, 제주의 돌미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참가하신 만큼 불교문화유산답사에 뜻깊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며, 불교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발굴에 더욱 힘써나가겠다”고 전했다.
예부터 제주불교는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른 민간적 토속신앙과 융합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제주의 돌을 이용한 문화예술의 다양한 형태로 이용하고 활용되는 등 돌문화가 거듭 발전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돌이 신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미륵이 탄생하게 이르게 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생활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돌은 신앙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생명과 영력을 부여받아왔는데, 이를 제주민중들은 ‘돌 미륵’이라 불렀다.
제주만이 독특한 유물로 탄생한 돌미륵은 제1차 답사에서 보았듯이 제주시 용담동 서자복이 바다를 지척에 둔 용화사에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미륵불이다. 돌하르방보다 훨씬 큰 높이 3미터가량의 석불입상으로 성안을 보호하려는 제주민들의 의지를 표현하며, 외호신장 역할을 맡아왔다.(민속자료 1~2호, 1971년 문화재 지정) 제주시 건입동 동자복미륵불은 조선전기인 1530년 간행된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랑』 에는 “만수사는 일명 동자복이다. 건입동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룡사 돌미륵
흥룡사 돌미륵

두 번째 답사에 나선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제주시 도평동 흥룡사로 향했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병풍처럼 주변이 암반으로 둘러진 곳이 바로 흥룡사다. 이 흥룡사는 옛 지명으로 용장굴이라 불리며, 천룡이 한라산으로 뻗어 내려온 산세를 따라 현 용장굴 속으로 몸을 감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천룡이 품었던 미륵불이 바로 대웅보전 옆 굴 앞에 있는 미륵부처 3기 가운데 가장 작은 석불이다. 매의 눈처럼 매섭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흥룡사는 매해 7월 21일(음) 미륵기도를 봉행하고 있다. 

서천암지 돌미륵
서천암지 돌미륵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장군로를 빠져나와 광령 서천암으로 가는 도중에 돌미륵을 발견해 보존되고 있는 한 식당정원으로 답사참가자들은 발길이 멈췄다. 
관세음보살처럼 옷주름이 용암을 타고 내리듯 다른 미륵에 비해 화려하다고 할까. 눈과 코, 입 모양새를 새겨넣어 주었으나 아쉽게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일까 돌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서천암’은 무수천에 큰 절로 자리하고 있었고, 고려시대 고승인 혜일 스님이(1275~1308) 주석했던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용눈이 굴, 절경 무수천, 매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서천암이 폐사되면서 지역주민들이 미륵불을 봉안, 덕절로 불리며, 부처님처럼 의지하고 기도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혜일 선사가 수행한 길, 행적을 따라 걸으면서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영산암으로 안전하게 버스는 달려가고 있었다.   

영산암 미륵당
영산암 미륵당

영산암은 1951년 마용기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수덕사였다. 산방산은 화산체이고 오름이다. 시원하게 솟아오르면서 요새 같은 거대한 바위산이다. 
마용기 스님은 이곳 ‘광령일당’에 미륵 부처님을 모시고 미륵당으로 동네 사람들은 마씨당, 마씨 미륵당, 마용기당으로 부른다. 이 당을 지키던 마씨 하르방이 죽어서 이 당의 당신(堂神)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마용기 스님은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신화같은 존재였다고 전한다. 대웅전에는 영정으로 모셔져 있다. 흥룡사가 그렇고 영산이 그렇다. 불교문화유산답사를 통해서 모두가 4·3으로 피해를 크게 입은 사찰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가 있었다.
불교문화유산답사에 참가한 정수영 보살은 “아는 만큼 배우고 가고, 한두 번쯤은 제주의 돌문화에 대한 궁금한 점이 많았다”며 “돌미륵은 돌하르방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토착신앙의 대한 변화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부처님은 늘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르고 지나왔구나” 하고 관심이 부족했었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또 “우리 주변의 불교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잘 보존해나가는데는 민속자료나 기념물, 문화재로 지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일에 사)탐라성보문화원이 더욱 힘써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치는데 불심을 다하는 불교문화유산답사 참가자들과 무료 찬불가 교실(제주음성포교단)을 운영하고 있는 현경학 회장과 회원들이 함께 ‘우리도 부처님 같이’를 합창하면서 사)탐라성보문화원 주최한 ‘제주의 돌미륵 고치 알아보게 마씀’ 제 2차 제주불교문화유산답사는 여법하게 회향했다.

영산암 대웅전에서 창건내역을 설명듣고 있는 답사 참가자들
영산암 대웅전에서 창건내역을 설명듣고 있는 답사 참가자들
영산암에서 찬불가로 답사 참가자들이 여법하게 회향
영산암에서 찬불가로 답사 참가자들이 여법하게 회향
향나무 밑에서 서 있었던 돌미륵 터
향나무 밑에서 서 있었던 돌미륵 터
흥룡사 경내를 둘러보고 있는 불교문화유산 답사 참가자들
흥룡사 경내를 둘러보고 있는 불교문화유산 답사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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