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 스님 법문 - “실상의 세계 알기 위해선 마음이 주인 되는 공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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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 법문 - “실상의 세계 알기 위해선 마음이 주인 되는 공부해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1.30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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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열반의 참뜻 아는 길로 걸어가는 길
기도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자기가 한 만큼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큰스님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큰스님

마음이 주인되게 하라.” 이것은 부처님께서 언제나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견고한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세속의 인연으로 만난 것들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천지와 저 수미산도 결국은 무너져 없어지는데, 하물며 사람 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석 달 전에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법으로서 부처를 이루었다. 이미 교법이 갖추어져 있으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배워 실천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녀 해탈을 얻도록 하여라.”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법’입니다. 해탈의 법, 열반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열반에 들겠다는 것입니다. 열반! 과연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열반의 참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열반의 길을 걸어 열반에 도달하라는데 있습니다. 번뇌망상의 불이 완전히 꺼진 평화와 지혜의 삶에 있습니다.
그 열반의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에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즐겨 행하는 기도를 예로 들어보고자 합니다. 기도는 단순히 복을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열반의 세계로 가는 길입니다. 열반을 향하여 꾸준히 걸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열반의 참뜻을 아는 길로 하루하루 또박또박 꾸준히 꾸준히 걸어가는 길입니다. 내 마음을 향하여, 내 수행의 길을 향하여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우리의 욕망을 성취해주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저 욕심을 채워주고 욕망을 이루어주는 것이 기도라면, 나는 우리 불자들이 일평생 기도를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봅니다. 그 법에 의지하여 우리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부처님께서만 알 따름입니다. 중생들의 눈을 가지고는 결코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란 자기가 한 만큼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면 성취가 되고, 저렇게 하면 성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만 했다 하면 성취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결코 기도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내가 한 만큼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하다 보면, ‘나’의 마음속에 기도성취법이 들어가게 됩니다.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염불뿐만 아니라, 법문을 듣는 것도 기도요, 참선을 하는 것도 경전을 공부하는 것도 다 기도입니다. 마음을 관하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모두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기도가 성취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차원에서 기도를 하거나 공부를 하여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공부나 기도를 꾸준히 해 나아갈 때, 자기가 한 만큼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기도와 같이 한 발짝 했으면 한 발짝 만큼 앞으로 나가고, 두 발짝 했으면 두 발짝 만큼 앞으로 나가는, 분명한 세계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부처님께서 길에서 태어나셨고, 마지막 가실 때에도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어가는 것이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도 없고 견고한 것도 없다.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망상분별로 하는 일은 속임이 될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몸소 보이고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가다가 어떠한 길에서 내 생명을 끝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정립해야 합니다. 결국은 모두가 흩어지고 마는 인생에서, 오늘 하루만 해도 수십만 번 생각 나고 죽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인생에서, 내 자신 속의 죽지 않는 ‘나’를 분명히 찾아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며 걸어가야겠다는 철학이 서야 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묻습니다. “스님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 나왔습니까?” 나는 두말 않고 대답합니다. “도 닦으러 나왔습니다.” 도 닦으러 나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머리를 깎고 절에서 참선하는 것만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길을 열심히 가는 것, 자기 길을 철저하게 걸어가는 것을 우리는 도를 닦는다고 말합니다.
금강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묻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결코 수보리에게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에게 수시로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항상 묻고 항상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의 부모를 볼 때, 너의 남편을 볼 때, 너의 아들, 딸 들을 볼 때, 과거 전생에 어떤 인연을 지어 금생에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묻고 계신 그 모습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왜 못 보는가? 눈으로 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왜 못 보는가? 눈으로 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두 눈으로는 앞을 보면 뒤를 못 봅니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서서히 피고 지는 연꽃도 보지 못합니다. 참으로 눈으로만 보아서는 참다운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불상, 마리아상, 십자가, 이 책상……모두가 우상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에 절하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상을 거쳐야 참된 상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우상으로 보여주신 것이지만, 그 우상을 통하여 내면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도록 이끄셨고, 마침내는 실상의 세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상을 거치지 않으면 실상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실상의 세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인 되는 공부’를 꼭 해야 합니다.

/ 정리·임관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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