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가는 길 - 관음사 - “민중의 아픔과 민족의 아픔 함께하는 리더십이 살아 숨 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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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가는 길 - 관음사 - “민중의 아픔과 민족의 아픔 함께하는 리더십이 살아 숨 쉬는 곳”
  • 임관표 기자
  • 승인 2022.12.08 0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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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무불시대 넘어 제주민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며 이어져 온 관음사에서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후불도 친견법회 열리길 희망
드라마 우영우 촬영지를 소개하고 있다.
드라마 우영우 촬영지를 소개하고 있다.

“내 허물을 지적하고 꾸짖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났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 준 고마운 분이니 그를 따르라 그런 사람을 따르면 좋은 일이 있을 뿐 나쁜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법구경 말씀을 오늘의 화두로 참구하면서 제주불교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200년 무불시대를 넘어 제주민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며 이어져 온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1909년 창건된 사찰로서, 최근 우영우 드라마 촬영지로 소개되면서 많은 불자들과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함께하는 기도수행 도량으로서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를 찾았다. 
일주문과 통일대불을 지나 사천왕문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4·3 유적지가 보여 잠시 묵념을 하고 나서 해월굴로 향했다. 참배를 마치고 관음사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부도탑에 예를 올리고 종각으로 향했다. 대웅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문화재 불상이 있는 극락전에 들어가 관세음보살을 참배했다.
관음사를 창건하고 제주불교를 중흥시킨 안봉려관 스님 사상을 살펴보자.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불법을 홍포한 안봉려관 스님의 사회사상은 항일운동 토대를 구축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대민종교·포교활동, 교육활동, 제주도민의 구심점으로 가난한 민중의 아픔과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는 리더십으로 제주지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안봉려관 스님이 교육사상은 1926년 ‘제주불교소녀단’과 ‘제주불교부인회’를 창립해서 신여성을 양성했으며, 1927년 성내포교당에서 ‘제주유치원’ 개원식을 거행하고, 1930년 불교유치원 창설을 위한 협의체 구성하고, 1935년에는 ‘제주중학강습원’ 개교에 앞장선다. 또한 사회 구호활동은 안봉려관 스님의 구제활동에서 빈곤층 병자치료에서 비롯된다. 1925년 제주도는 기근이 심각했고 안봉려관 스님은 기독교, 천주교계 주요 여성과 함께 기근 구제조직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에 나선다.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상호 간 첨예하게 대치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 이후 한라산이 입산 금지가 풀리면서, 지난 1969년부터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해월각, 사천왕문, 일주문, 종각, 제주대불(통일대불), 설법전, 한라선원, 영락원, 미륵대불, 나한전, 대불전 연못 등이 차근차근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6호 목조관음보살좌상
제주도유형문화재 제6호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시대 불상인 제주도유형문화재 제16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 불상은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하여 1698년(숙종 24)에 조성하여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에 봉안하였던 것을 1925년 승려 안봉려관(安逢廬觀, 1865~1938) 스님이 제주 관음사로 옮겨온 것이다. 전체 높이 75㎝, 얼굴 높이 14㎝, 어깨 너비 34㎝, 무릎 높이 13㎝, 무릎 너비 47㎝ 규모로서 등신대에 가깝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는데, 관 정면에는 8개의 커다란 꽃무늬를 배치하였고 좌우로도 화려한 장식이 있다. 얼굴은 양감이 있고 단아하게 표현하였으며 옷주름을 유려하게 묘사해놓아, 조선 후기의 보살상 가운데에서도 특히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조선 후기 전형적인 보살상 조각상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양감 있고 단아하게 표현된 얼굴,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은 당시의 보살상 중에서도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는 더욱 크게 평가되고 있다. 별도로 제작된 손은 손목에 끼워 넣었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중품하생(中品下生)의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을 취하고 있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를 인용했다.
제주 관음사 후불도는 제주특별자치도 등록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화의 크기는 가로 275.5cm, 세로 140.7cm이다. 제주 관음사 후불도는 1940년 10월 17일 근현대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화승(畵僧)인 금용 일섭(金蓉 日燮) 스님이 관음사 성내포교당에 봉안하기 위해 그린 불화이다. 특히 화기(畵記)와 일섭 스님의 자필기록인  『연보(年譜)』 에는 해당 불화를 그리기 위해 제주에 입도한 시기, 함께 참여한 화승, 작업내용 등이 기록돼 있으며, 해당 불화의 초본이 현재 김제 부용사에 남아있는 등 작품성을 갖춘 근대기 불화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설법인을 취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두 명의 보살과 10명의 제자들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지장보살과 시왕, 오른쪽에는 백의의 관음보살이 16나한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화면은 크게 상·하 2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흰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구름으로 화면을 구획하였다. 유운(流雲)으로 분리하여 마치 아미타삼존이 구름을 타고 하단의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전체 화면의 약 1/3에 해당하는 하단에는 명경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극락을 향하는 반야용선을 맞이하는 아미타삼존과 주악천녀들이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시왕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의 지옥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극락으로 향하는 용선은 휘장과 등으로 장식된 실내를 묘사하고 있는데 배의 앞머리에는 지장보살이 서서 인도하고 있으며 차례대로 용선의 뒤쪽 끝에 앉은 여래를 향해 예를 올리는 왕생자 무리, 인로왕보살 등이 표현되어 있다. 배 아래에는 험악한 인상의 인물이 배 위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칼과 창으로 위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속세와 용선 사이를 벽돌로 쌓은 담으로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지옥 장면은 죄인의 혀를 빼내어 그 위를 소가 쟁기질하는 발설지옥, 나무판에 죄인을 눕히고 못을 박는 철정지옥, 펄펄 끓는 기름 솥에 죄인을 넣어 죽이는 화탕지옥, 기둥에 죄인을 묶고 톱으로 써는 거해지옥 등 지옥의 다양한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불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적인 아미타극락회상도와 달리 화면 하단 중앙의 명경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반야용선도와 지옥도를 한 화면에 함께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제주 관음사 홈페이지 인용)
관음사는 산천단을 지나 신비의 도로와 함께 절로 가는 길 인욕과 지계의 길에 속해 있다. 소림사가 있었던 산천단은 도제를 지낸 곳으로서 천연기념물인 곰솔이 있다. 삼의악 계곡을 따라 관음사 동쪽 계곡으로 절로 가는 길을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다. 
본 기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유형문화재 친견 법회가 열리고 안봉려관 스님과 제주불교 역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희망하면서 한라산 영산대재 보존회가 설립되고, 더 나아가 영산대재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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