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 『표해록』 해부 - “끼었던 안개가 확 걷히자 동서남북이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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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 『표해록』 해부 - “끼었던 안개가 확 걷히자 동서남북이 훤히 보였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2.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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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살았다. 살았어.”
일행이 탄 배가 바람 따라
이름 모를 섬에 가까워지자
기쁨에 가득 차 소리쳤다

호산도에 상륙

1770년 12월 28일 맑음

장한철 일행은 표류 중에도 잠을 청하는 여유가 있었다. 뱃사람들의 기질이랄까? 아니면 뱃사람들만이 표류 속 믿음 때문이랄까?

봇짐을 열어 노란 감, 귤, 유자, 마른안주, 술을 꺼내 나눠 먹는 시간을 가짐에 긴 밤도 짧게, 사실 불안한 건 장한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같은 생각이었지만….

겨우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같았다.

장한철은 중얼거리며 비시시 일어났다. 잠시 후 바다에 북풍이 일면서 끼었던 안개가 확 걷히자 동서남북이 훤히 보였다. 바다 사면이 드러났다.

“섬이 보인다.” “이젠 살았다. 살았어.”

일행이 탄 배가 바람 따라 이름 모를 섬에 가까워지자 기쁨에 가득 차 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응당 선비님 집에서 종노릇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행이 웃으면서 농담을 장한철에게 건넬 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 며칠을 표류하며 여인국 이야기를 들으며 황홀감도 느껴 봤고, 노인성 이야기를 들을 땐 장한철의 유식함을 익히 익혔으며 유구태자 이야기를 할 땐 몸서리까지 치며 며칠을 버텨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돌아가며 뱃사람 모두가 이젠 한 몸이 되었음을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모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된 이유를 제공해 준 장한철을 무한히 존경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드디어 배가 해안에 다다르자 바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장한철 양팔을 붙잡고 몸을 부축하여 섬에 내려주는 것에서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이 이뤄지며 더욱 돈독히 하나가 되는 모양새였다.

일행은 고된 표류 생활을 잊은 채 서로 둥그렇게 모여 앉았을 때, 장한철은 친우 사공 이창성이 말을 꺼냈다.

“섬 안에 먹을 물이 없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 샘물 있는 곳을 찾아보겠습니까?”

탐라 상인 김재완이 대답하면서 나섰다.

“전에 제가 바다 위에서 악담(남을 비방하거나, 남이 잘못되도록 저주하는 말)했던 죄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샘을 찾는 일을 제게 맡기시면 그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샘을 찾을 수 있게 허락하소서.”

탐라 상인 김재완은 짚신을 고쳐 신고는 먹을 물을 찾아 서너 발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푸른 사슴이 해안가 수풀 사이에서 나와 서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때 장한철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탐라 상인 김재완을 가로막는다.

“그대는 이제 샘을 찾아갈 필요가 없구려. 내가 이미 샘물을 얻었소.”

일행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장한철에게 물었다.

“저 사슴이란 놈은 산에 사는 짐승으로, 살아가려면 들판에서 싱싱한 쑥을 먹고, 못에 가서 물을 마셔야 하는 법이오. 그러니 이 섬에 샘과 시내가 있다는 증거이오.”

“이 섬은 비록 작은 섬인 듯하나, 필시 남북으로 길게 뻗고 동서로 폭이 좁을 것이오. 작은 섬이 아님이 분명하오. 들판이 30리가 넘지 않으면, 발굽과 뿔을 가진 짐승들이 살 수 없다고 하였소. 이제 사슴이 있는 거로 미루어 보면, 섬의 크기가 필시 30리는 족히 넘을 것이오.”

“사슴이 우리를 경계하지 않음은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음이나 이렇게 큰 섬을  무인도로 버려둠은 이상한 일이오.”

 

만약 섬에 사람이 산다면, 모래 해안에 고기를 잡았던 흔적이 있어야 할 것이고, 숲 사이에 해산물을 잡으러 다니는 길이 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그런 흔적이 이 섬 아무 곳에도 없기에 장한철은 무인도라 확신하고 벌써 눈치챈 것이다.

“이번 뱃길에 처음부터 창귀(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못된 귀신)가 붙어, 내가 그대를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음이 없었네. 그렇지만 매번 그대의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지며 걱정이 풀리는구려!”

사공 이창성은 짐짓 여유를 부리며 장한철을 골려 먹는 양 놀리지만, 한편으론 감탄사를 남발하고 있었음이리라.

일행이 발걸음을 옮겨 주변을 살펴보니 과연 한 줄기 맑은 샘물이 있었다. 맛이 아주 달고 시원했다. 이제 살맛이 나는 듯 일행의 발걸음도 매우 가벼웠다.

일행이 땔나무를 줍고 물을 길어 죽을 쑤어 먹었다. 모처럼 안심이 되는 듯 사람들이 모두 피곤하고 힘들어 해안가 모래밭 가장자리에서 서로 뒤엉켜 잠을 잤다.

잠시 후 일행이 부스스 눈을 뜨며 장한철을 바라보았다.

“선비께선 피곤하지도 않으시오?”

장한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장한철이라고 몸이 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한 피곤함이 없었겠는가? 

장한철은 일행을 책임질 지도자였다. 그러니 한숨도 돌리지 못한 채 그들을 안심시키며 일행이 잠든 모습을 보며 걷어찬 이불을 덮어 주는 섬세한 지도자의 길을 걸었기에 일행 모두는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우리는 이제 어찌하오리까?”

일행이 장한철에게 뭔가 지혜를 주길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이 섬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갯가에 필시 전복과 조개 종류가 많을 것이고, 산속에 들쥐들이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을 것이오. 우리가 만약 들쥐가 먹는 풀뿌리를 캐고 또 전복과 조개로 반찬을 한다면, 족히 목숨을 지탱하여 살 수 있을 것이오.”

행은 장한철의 말에 따라 혹여 이 무인도에서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배에 들어가 배 안의 물건 사정을 알아보았다.

“소금과 간장이 부족하오.”

사람들은 또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건 괜찮소. 내가 바닷물로 소금 굽는 법을 알고 있소. 그러니 식사에 간장이 없음을 굳이 꼭 걱정할 게 있겠소? 양식만 있으면 되오.”

장한철의 말에 좌우 일행은 너무 기뻤다. 아니, 그의 유식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음이리라.

“쌀도 얼마 남지 않았소.”

사람이 갖고 온 쌀이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아보니 흰 쌀이 한 말(곡식이나 가루, 액체 따위의 부피의 단위로 열 되를 한 말이라 함) 있었고, 나머지 좁쌀이 대여섯 말쯤이었다. 이는 29명이 먹을 수 있는 며칠 양식에 지나지 않았다.

“죽을 쑤어 먹으면 좀 오래 버틸 것이오.”

장한철의 말에 이제부터 죽을 쒀서 먹으며 목숨을 잇는 것을 원칙으로 해도 6~7일 치 양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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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문학박사 / 동화작가
 • 2006. 05. 26. 솔로몬 종합대학교 명예문학박사   • 2012. 8. 22. 영남대학교 교육학박사(설문대할망 연구)
 • 대전교육연수원 강사 2년       • 제주대학교 등 겸직교수(강사) 12년   • 한라도서관 운연위원 등 20년   

 • 대한민국독서대전 운영위원장 등 4번    • 도서출판 영주 대표       •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소장
 • 표해록 등 종이책 150권 전자책 358권(종이책과 중복 있음) 출간 
 •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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