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참선(參禪)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며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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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참선(參禪)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며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2.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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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아서 깨달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이대로가 부처다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참선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꼭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가 애쓰고 공부해도 별로 큰 소득이 없습니다. 달마(達磨)스님도 이런 말씀을 했어요. ‘약능료심수도(若能了心修道)면 만약 우리가 마음이 무엇인가를 대체로 알고 닦으면 즉성공이이성(則省功而易成)이라, 별로 공을 많이 안 들이고도 빨리 성취할 수가 있고, 약불요심이수도(若不了心而修道)면, 만약 내 마음자리가 무엇인가를 우선 이론이라도 모르고 닦으면 내비공이무익 (乃費功而無益)이라,’ 종래 이익이 없다 말입니다.

선(禪)이란 무엇인가? 참선이란 무엇인가? 참선 이것은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 많은 법문이 있고 갈래가 많지만 참선 이것은 불도의 바른 문(門)입니다. 성불의 첩경입니다. 성불하는데 가장 가까운 지름길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인도 부처님 당시 참선과 중국에 와서 참선이 발전되어 한국까지 내려온 참선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어록(語錄)도 많이 있고 논장(論藏)도 많아서 굉장히 복잡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제가 간추려서 말씀하는 것이니까 명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도(印度)에서 부처님 당시는 보통 점차(漸次)로 단계로 올라가서 닦고 올라가서 나중에 깨달아 버리는 그런 참선이었습니다. 허나 사람들의 지혜도 보다 명료해지고 불교도 보다 더 완숙된 보다 익어진 단계에 이른지라 그때 와서는 이렇게 점차로 올라가는 선법이 아니라 먼저 몰록 비약적으로 그냥 먼저 마음을 열어버린다 말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깨닫고서 나중에 닦는다 말입니다. 물론 먼저 선오(先悟)라 온전한 깨달음은 못되겠지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보조국사(普照國師)식으로 말하면 그때는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문득 그냥 마음자리를 딱 깨닫고 닦는다 말입니다. 이른바 중국에 와서 우리 한국까지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한국의 참선의 뿌리는 그러한 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하는 선법은 어떠한 명상(名相) 따라서 이름이나 상을 따라서 하는 유루선(有漏禪)이라. 그렇게 말해 있고 또한 부처님께서 보통 경(經)에서 말씀하신 그런 선법은 여래선(如來禪)이라. 그렇게 말해 있고 허나 내 마음이 본래 부처라.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니까 원무번뇌(元無煩惱)라. 원래 번뇌가 없고 바로 본다면 이 몸 이 마음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일해서 바로 못 봅니다.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나한테도 번뇌가 있고 너한테도 번뇌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지만은 바로 본다고 하면 그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네 번뇌 내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닦아서 깨달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이대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대로 부처니까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조금도 번뇌가 없는 일체공덕이 다 원래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다만 한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공덕(功德)을 우리가 못 씁니다. 객진번뇌(客塵煩惱)라, 끝도 없는 번뇌 원래 없던 번뇌가 딱 덮어서 못 쓴다 말입니다.

원래 번뇌가 없던 것인데 자기 스스로 불여의(不如意)를 느끼니까 스스로 번뇌(煩惱)가 생겨서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무루지성(無漏智性)’ 모든 공덕지혜(功德智慧)를 우리가 못 쓴다 말입니다. 본래시불 원래 부처니까 원무번뇌(元無煩惱)라,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성 본자구족’이라, 일체 공덕과 지혜가 원래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고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번뇌에 갇혀서 지금 미처 못 깨닫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를 느끼고 닦아야 참선 그러는 것입니다. 선오(先悟)없이 점차로 닦아가는 그런 것은 중국(中國)이나 우리 한국(韓國)에 와서는 참선(參禪)이라 미처 말을 못 붙이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미혹해서 한 번뇌도 못 끊고 닦는다 하더라도 먼저 내가 부처다. 부처가 딱 된 자리에서 닦아 나가야 비로소 그 때는 참선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즉 선(禪)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선시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자리, 불심자리를 먼저 딱 집어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집어들 것인가?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 합니다만 자기가 지금 교학도 못 배우고 또한 참선도 않고 했다할지라도 역시 참선을 한다고 할 때는 먼저 내가 바로 부처구나 내가 지금 어리석고 번뇌에 가려서 못 보는 것이지 깨달은 부처님께서 본다고 할 때는 내 어리석은 이대로 부처고 내 안에는 무한의 무진장(無盡藏)의 보배가 있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라 말입니다. 우주 가운데는 무진한 보배가 있고 내 마음 가운데 역시, 불교에서는 내 마음과 우주와 둘이 아닙니다. 불심과 내 마음과 둘이 아닙니다. 그 마음 가운데는 일체 무진의 보화가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정도에 따라서 우리 업장(業障) 따라서 좀 더 많이 발현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인가? 깜깜한 것이 어떻게 부처인 것인가? 이것이 납득이 안갑니다. 내가 부처란 말은 다 말들은 많이 하고 살지만 납득이 안갑니다. 납득을 시키기 위해서 화두(話頭)가 생기고 무엇이 생기고 한단 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화두를 들어도 그냥 화두 이름이나 상에 명상(名相)에 걸려듭니다. 화두의 본래가 무엇인가? 가사 육조 혜능(慧能)스님께서 일반 대중한테 시삼마(是甚麽)라,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받치고 항시 내가 움직이고 내가 활용하는 가운데 있다.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한 말로 말하면 불성佛性 안 되겠습니까?

나의 본성(本性)말입니다. 내가 원래 갖추고 있지만 내가 어떻게 본성을 거부한다 말입니다. 마음이 열려버린 사람들은 그냥 그 말 들으면 아! 그렇구나 딱 느끼지만 마음이 이것저것 번뇌에 가려서 딱 폐쇄가 되었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심(衆生心)은 너무나 복잡한 인연 때문에 지금 딱 갇혀 있습니다.

마음을 확 열어 버리면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 버리는 것인데 지금 갇혀 있다 말입니다. 『문수다라니경(文殊陀羅尼經)』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초목무심어(草木無心語) 생호소승(生乎小乘)’이라, 나무나 풀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쉽게 생각할 때는 마음이나 불심은 사람한테만 있지 나무나 풀에 무슨 불심이 있으리요 하겠지요. 그와 같이 초목에나 불심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호소승이라, 소승에서 하는 말이란 말입니다. 대승에서는 비록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 외에 동물뿐만 아니라 두두물물(頭頭物物) 어떠한 것이나 하나하나마다 불심이 있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천지 우주가 부처님뿐이다 말입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다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부처를 하나로 봅니다. 마음 통하면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거니 바로 마음이거니, 풀이나 나무에가 마음이 없다고 보겠습니까.

어째서 내가 부처인 것인가? 본래 부처라, 어째서 부처인 것인가? 참선하실 때 마음이 안 열리면 참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부처라 해도 껌껌한 내가, 이렇게 못나고 남도 미워도 하고 좋은 것은 집착도 하고 이런 내가 왜 부처인 것인가? 부처라는 것은 원래 사랑도 미움도 다 떠난 것이라고 했는데 내 마음이 지금 욕심이 꾸역꾸역 차있는데 내가 어째서 부처인 것인가? 바로 못 보아서 부처인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선 어째서 바로 못 보는 것인가? 나라는 것에 딱 거기에 얽매여서 그럽니다. 나라는 것에 얽매여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그 놈의 아(我)! 나 아(我)자 조금 풀어서 말하면 아집(我執)이라, 나 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나한데 꽉 심식이 잠재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놈의 아(我)에 묶여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안 트여서 바로 못 봅니다.

원래 부처건만 바로 보면 분명히 부처건만 나라는 아집에 얽매여서 그때는 못 본다 말입니다. 따라서 나 이놈을 나라는 것을 처부서야 합니다. 제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나라는 것 못 쳐부수면 절대로 공부는 안 됩니다. 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반야심경(般若心經)』 허두에 가서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본다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비교해서 불교 기본교리를 너무나 공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막 입문하면 마태복음서 몇 장 몇 절 줄줄 외운단 말입니다. 요한 복음서를 외이지만 불교인들은 중 되어서 몇 년이 되어도 사제법문하나 바로 해석도 못하고 신도가 되어서 몇 년이 되어도 사대 오온하나 바로 해석을 못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기본적인 것은 자꾸 익혀서 외우셔야 합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이라, 오온이 가짜로 합해져 잠시간 화합되어 있다 말입니다. 그 오온은 무엇이냐?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이것이 오온입니다. 마치 너무 기초 법문 같아서 안 되었습니다만 우리가 좌선을 하더라도 고생스럽게 자기한데 얽매여서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정리 임관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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