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58)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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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58)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2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1.1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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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원사 대웅전 북쪽에 나 있는 출입문 바로 서쪽 편의 벽은 석씨원류 벽화가 그려진 14개의 벽 중 9번째 벽이다. 이 벽에는 총 13장면의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맨 윗단 왼쪽이 순서상 마지막 장면이다. 소아시토(小兒施土)라고 알려진 설화로 어린아이들이 흙장난하다가 부처님 일행을 보고 한 아이가 부처님께 흙으로 만든 쌀을 공양하는 장면이다. 『현우경(賢愚經)』 3권 「아수가시토품(阿輸迦施土品)」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어난 일이다.
 

흙장난하던 아이가 흙으로 된 쌀을 부처님께 보시한 공덕으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小兒施土)
 
부처님께서 아침에 아난과 함께 성 안에 들어가 걸식하다가 아이들이 길에서 소꿉장난하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흙을 모아 집과 창고를 짓고 창고 안에 흙을 쌀이라 하며 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아이가 멀리서 오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들이 쌀이라고 정한 흙을 가지고 가서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부처님께서는 허리를 숙여 아이의 흙을 받아 아난에게 주면서 아이에게 보시 받은 흙을 가지고 가서 자신의 방바닥에 바르라고 했다. 걸식을 마치고 기원정사에 돌아온 뒤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그 흙을 부처님께서 머무는 방바닥 한 귀퉁이에 발랐다. 그리고 부처님께 가서 일을 마쳤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침에 아이가 내게 기쁘게 흙을 보시하여 그 흙으로 내 방 한 귀퉁이를 발랐다. 그 아이는 그 공덕으로 내가 열반에 든 후 백 년쯤 뒤에 한 나라의 왕이 되고 그 이름을 아수가(阿輸伽)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나라의 대신이 되어 여러 나라를 영도하면서 삼보를 받들고 널리 공양을 베풀며, 나를 위하여 나의 사리(舍利)를 온 나라에 나누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울 것이다.”
이에 아난은 기뻐하여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어떤 공덕을 지었기에 그런 많은 탑의 보응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아주 옛날 큰 나라에 파새기(波塞奇)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는데, 그는 염부제의 8만 4천 나라를 다스렸고, 그때 세간에 나온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이 불사(弗沙)였다. 파새기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그 부처님과 승려들을 한량없이 공경하며 정성껏 공양드렸다. 그러다 어느 날 왕이 가만히 생각하였다.
‘지금 내 나라 백성들은 언제나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공양할 수 있지만 주변의 작은 나라의 변두리에 사는 백성들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복업을 쌓을 인연이 없다. 어떻게 하면 그들도 복업을 쌓을 수 있을까? 그래. 부처님 초상화를 그려 여러 나라에 널리 나누어 모두 공양하게 하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뛰어난 화공들을 불러 부처님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화공들은 부처님 곁에 와서 부처님 상호(相好)를 보고 그리려고 했는데, 한 곳을 그리고 나면 다른 곳은 잊어버리고 다시 자세히 보고 붓을 들어 한쪽을 그리면 다른 쪽 모습은 또 잊어버려 부처님의 모습을 온전히 그릴 수 없었다. 그러자 불사부처께서 여러 가지 색을 조화롭게 하여 손수 자신의 초상을 그려 화공들에게 본보기로 삼게 했다. 화공들은 그 그림을 모사하여 모두 8만 4천 장의 초상을 그렸고, 파새기왕은 그 초상을 각 나라에  한 점씩 나누어 주며 꽃과 향을 마련하여 공양하게 하였다. 각 나라의 국왕과 신민들은 부처님 초상을 얻어 기뻐하고 공경하여 받들기를 부처님을 직접 뵌 듯이 했다. 
아난아, 그 때의 파새기왕이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니라. 나는 그 때에 8만 4천의 부처님 상을 그려 여러 나라에 널리 퍼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양하게 한 공덕으로 말미암아 부처가 되었다. 그리고 열반한 뒤에는 다시 이 8만 4천 개의 탑의 보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처님께 흙으로 된 쌀을 보시한 아이는 그 공덕으로 나중에 왕이 되는데, 바로 아소카왕이다. 한자로 아육왕(阿育王)이라고 쓰는 아소카왕은 서방의 알렉산드로스왕의 동방 원정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인도 최초의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석탄일에 방영되는 인도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소카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많은 이복형제들과 신하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후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인도 전역을 아우른 후 인도 동북부 지역에서 자기 왕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는 강국 칼링가 왕국을 정복한다. 오랜 정복 전쟁 과정에 전쟁터에서 본 수많은 시체와 고아가 된 아이들이 굶어죽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아소카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영토 확장을 중지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의 교리를 통치에 반영했다. 왕국 전역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 복지 시설을 건설하고, 싼 이자로 식량을 빌려주고 물이 부족한 지역에 우물을 파거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는 등 공공사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동물의 도살과 사냥에 대한 규제도 마련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강제 노동을 금하는 등의 법을 만들어 인도 전역에 그 칙령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 중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4사자기둥(사진 1)의 조각은 오늘날 인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바퀴 모양의 법륜은 인도 국기 정중앙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직후에 만들어진 8개의 불탑에 안치된 사리를 꺼내 고운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 기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인도 불교를 융성케 한 아소카왕은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이자 전륜성왕이라 불리었다.
어린아이가 부처님을 공경하여 자신이 가지고 놀던 흙으로 된 쌀을 보시한 공덕으로 후세에 전륜성왕이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인연과 과보, 보시를 강조하는 후대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인도의 사원이나 탑에 이 이야기가 조각으로 새겨졌고, 우리나라 팔상도의 녹원전법상에도 그려졌다. 안타깝게도 각원사 대웅전 벽(사진 2)에는 이 장면 일부의 채색이 박락되어 내용을 온전히 확인하기 어렵다. 석씨원류 판화(사진 3)의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박락된 내용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송광사 팔상도의  〈소아시토〉 장면(사진 4)을 통해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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