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 “어딘가 귤나무가 있을 듯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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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 “어딘가 귤나무가 있을 듯하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1.1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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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어디에 가도 귤나무가 있음직 해
올라가다 보니 시냇가 수풀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귤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섬(호산도) 생활
 

1770년 12월 29일 흐림

장한철 일행이 호산도에 닿아 주변을 살펴보니 산이 보였다.
장한철은 뱃사람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아스라이 유구가 보이는 듯 착각에 빠진다.

유구는 오키나와라는 곳으로 현재 일본 최남단 섬이다. 청나라 일본 영토이던 오키나와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병합된다. 열대성 기후이고 장수 지역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이 점령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한다. 40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구성된 동서 1000km, 남북 400km 섬이다. 아열대 기후이며 희귀 동식물이 많다. 장마와 태풍이 잦으며 지진은 적으며 고대 류큐 왕국이며 태조 왕건 때는 고려의 속국임을 자처했던 곳이다. 1879년 일본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제국에 병합된다.

주) 유구는 삼별초가 마지막으로 피난 간 곳으로 어떤 문헌에 기록돼 있다. 삼별초가 자리 잡은 곳이라 하는데 사쓰마 번이 지배한 곳이라 한다.

장한철 일행이 산봉우리에서 주변을 관찰하면 호산도의 환경을 표해록에 기록된 부분이 있다.

남북 길이가 가히 20여 리이고, 동서로는 5리가 안 되었다. 섬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가 빼어남을 다투어, 높이가 가히 50여 길은 되었지만, 높낮이가 같지 않았다. 흙 색깔은 불그스레하고, 언덕과 계곡이 많았다. 섬 주변에는 나무들이 빽빽하고 푸르렀다. 두충나무와 소나무, 잣나무들이 많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풀과 나무들이 있었다. 봄이 되지 않았으나, 이미 새잎이 돋아나 한창 뽐내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2~3월의 기후와 비슷했다.

장한철 일행은 약초를 캐보니 팔뚝만 했다. 쥐는 고양이만 했고 노루와 사슴이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다. 물새와 들새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까마귀와 갈 까마귀들이 수풀을 에워싸고 있었고,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물가에 가득했다.

섬 속에 물이 아래로 흘러 긴 계곡이 되었고, 굽이굽이 흐르다가 동쪽 바다로 들어가는데, 장한철 일행은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는지? 여러 뱃사람이 모여 시냇가에  발을 담고 앉았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맑고 깨끗한 것이 사랑스러워서 머뭇거리며 떠날 수 없는 듯, 누군가가 시를 읊는 듯 흥얼거림이 흘러오자 장한철은 목청껏 시 한 구절을 소리 내 술도 안 먹었는데 술 취한 듯 읊조렸다.

이런저런 얘기 속에 어디선가 큰 귤 하나가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걸 보았다.
선부 정보래가 얼른 달려가 귤 상자를 꺼내와 장한철에게 건네며 의아해했다.
“이는 탐라에서 나는 물건입니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을까요?”
장한철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만면에 웃음 짓고, 귤 상자를 본 뱃사람들은 고향 친구를 만나듯 고향에 온 듯 서로 다투어 말을 하며 반겼다.
“어딘가 귤나무가 있을 듯하오”
장한철의 말에 뱃사람들은 너무 신기함을 느낀다. 귤은 세상 살다 보니 제주섬에만 있는 신기한 보물로 귤나무 한 그루면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 하지 않는가? 
암튼 소문(입말)에 의하면 귤은 일본 유구 지방에도 있는지라 이곳에서 유구(오키나와)와는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귤 상자가 물길 따라 떠내려오니 이 섬 어디에 가도 귤나무가 있음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올라가다 보니 시냇가 수풀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귤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짙푸른 잎이 그늘을 이루고, 노란 과일 빛이 어우러져 있었다. 
장한철 일행은 다투어 귤을 따 실컷 먹고 나머지는 보자기에 싸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 200여 개를 캐었다. 전복이 큰 것은 지름이 4~5촌(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10촌이 1척이 됨. 1척은 약 30㎝, 1치는 3㎝ 정도(정확히는 3.333㎝), 따라서 약 15㎝를 가리킴)으로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바다 밑에 전복과 물고기가 아주 많아서 다 캘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손길이 덜 미쳤던 곳이리라.

이제 장한철 일행은 산속에서 캐낸 약초도 많고, 귤도 많고 전복도 많이 확보하여서 양식 걱정은 덜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양식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등짐을 지고 걸어야 할 만큼이었다.
저녁때 모두 초막(풀 따위로 지붕을 만들어 조그맣게 지은 집)에 모여 산 약초를 잘게 토막을 내고 쌀과 섞어서 불을 지펴 밥을 짓이고 전복은 굽기도 하고 회로 먹기도 하였다. 
장한철 일행이 2만 리 머나먼 바닷길에서 만난 풍랑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날 수 있었음은 정말로 큰 행운이었다.

/장영주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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