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에 담긴 선취여행 (18) - “열반은 현실을 배경으로 이상의 경지 이뤄내는 말로 태어난 것”
상태바
한시에 담긴 선취여행 (18) - “열반은 현실을 배경으로 이상의 경지 이뤄내는 말로 태어난 것”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2.01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노·병·사의 근심과 슬픔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탐욕의 불꽃, 노여움의 불꽃,
어리석음의 불꽃을 완전히 태워
열반에 이르러야
곽경립(시인, 수필가)
곽경립(시인, 수필가)

옛사람은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는 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강물이 오죽 빨라 보였겠습니까. 강물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지금은 강물이 얼마나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날아가는 비행기는 볼 수 있어도, 가는 세월은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연에 의해 태어난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변화하며 존재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간과 공간만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공간은 훨씬 좁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서둘러라, 서둘러야 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역설입니까, 죽기 살기로 뛰어봐야 우리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5~60년대만 하여도 제주에서 서울로 가려면 하루나 이틀은 족히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짧아지거나 길어진 것도 아니고, 공간이 좁아지거나 넓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루나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에 간다고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나 스물여섯 시간으로 불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빨리 가고 늦게 간다고 거리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사람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바빠진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참 편해졌는데도 더 편해지기 위하여 더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이웃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 뿐입니다. 때로는 형제자매도 나를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탐욕과 이기로 차 넘치고 있습니다. 더 빠르게, 더 빨리,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서둘러 달려갑니다. 그나마 듣기조차 싫은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반성하며 살아가지만, 쾌락과 탐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 삶의 끝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후회는 언제나 되돌릴 수 없을 때가 되어야 찾아오는 것입니다. 『잡아함경 』8권에 보면, 어느 날 석존은 새로운 제자들을 데리고 가야시산(象頭山)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황혼의 붉은빛으로 변해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설했습니다. “비구들이여, 눈(眼)이 타고 있다. 그 대상을 향해 타오르고 있다. 귀(耳)도 타고, 코(鼻)도 타고, 마음(心)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인가, 탐욕(貪)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瞋)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痴)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생生·노老·병病·사死의 근심(愁)과 슬픔(悲), 그리고 번뇌(惱)의 고통(苦)에서 벗어나려면, 탐욕의 불꽃, 노여움의 불꽃, 어리석음의 불꽃을 완전히 태워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설합니다. 석존의 설說한 열반涅槃이라는 술어는 죽은 다음에 찾아가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이루어내는 말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은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어 불우한 삶을 살았던 만당晩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삶 속에서 겪었던 애증愛憎을 어떻게 버리고 있는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은李商隱(812~858)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만당晩唐 때의 시인으로 본적은 하남성河南省 심양현沁陽縣 이지만, 조부 때 정주鄭州로 옮겨 살았습니다. 선조들이 일찍 병으로 죽어 가까운 친인척이 없었던 시인은 생활이 넉넉지 못한데다 몸이 약해 성격이 내성적이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의 시는 내용이 다채로우며, 당시의 정치 상황과 사회 면모를 심도 있게 반영하는 동시에 국사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무제無題」라는 시제詩題를 개발했으며, 남녀의 애정과 실연의 고통을 스스럼없이 드러냄으로써 중국 시가에 큰 자국을 남겨놓았습니다. 시의 앞 네 구는 시인이 저녁나절에 청라산에 계시는 고승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을 저녁 풍경과 함께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머지 네 구는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살면서 겪었던 좋지 못한 일로 인해 가슴에 품었던 사랑과 증오가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서술적으로 한번 풀어볼까요, 엄崦은 해지는 산이고 청라靑蘿는 하남성河南省 제원현濟源縣에 있는 청라산靑蘿山을 말합니다. 해는 산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어가는데, 시인은 노스님이 계시는 청라산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스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산속이라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나 봅니다. 어디에 있나 찾아보니 구름이 두둥실 흐르는 건너편 길에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한가로이 경쇠를 두드리는 스님이 보입니다. 너무나 평화로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시인은 먼지 가득한 속세의 삶이 모두 집착으로 벌어지는 일순간의 환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