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한국불교, 삼법인(三法印)으로 돌아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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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한국불교, 삼법인(三法印)으로 돌아와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2.0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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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물질 면에서 볼 때
수조 개로 이루어진 물질들의 요소가
상의상관하며 임시적으로 찰나찰나 유지되는 상태이고,
마음 면에서 보더라도 수조 개로 이루어진 정보들이
상의상관하며 임시적으로 찰나찰나 유지되는 상태일 뿐
백관 스님(제주시 조천읍 백금사 회주)
백관 스님(제주시 조천읍 백금사 회주)

불교의 근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이 법을 깨달으심으로써 성불하셨다. 부처님께서 평생에 걸쳐 중생을 위해 내리신 팔만대장경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이라는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요 가지이며, 잎과 꽃과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라는 말에서 ‘연’은 조건을 의미하고, ‘기’는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기는 연기연멸(緣起緣滅)의 줄임말이며, 연멸이라는 말에서의 ‘멸’은 사라짐, 또는 무너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연멸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짐’을 뜻한다. 이 이치를 불교 경전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어지고, 저것이 없어짐으로써 이것이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므로 남자가 있다. 따라서 만일 남자가 없다면 당연히 여자가 없게 된다. 같은 식으로 높은 사람이 있으므로 낮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으므로 높은 사람이 있으며, 높은 사람이 없으면 낮은 사람이 없고, 낮은 사람이 없어도 높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자, 여자가 있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그것은 그렇다. 그렇긴 하지만 이쪽이 없으면 저쪽이 없게 되는 이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을 곰곰이 음미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런 유의 구별에 의해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들에 ‘실체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 모든 것들은 상의상관적으로 있다. 물질적인 사물들을 들여다보면 마치 갈대 단 두 개가 서로 의지하여 서 있듯이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 필자는 여기서 잠시 ‘존재’라고 말했지만 보다 정밀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란 ‘불변하며 독자적으로 있는 것’을 뜻하지만 실제로 물질적인 모든 것들은 불변하기는 커녕 순간순간 변하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가 아니라 상의상관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 쉬운 예로써 우리는 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은 수소와 산소라는 두 원소들이 서로 의지하여 결합함으로써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그 상의상관성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바뀌게 마련인 조건 변화에 따라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수소와 산소에게 지금과 다른 조건이 부여되자마자 그것은 분해되어 수증기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수와 수소는 의지되는 상대 없이 저 혼자만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 또한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 여러 것들이 상의상관하여 ‘항시적’이 아니라 ‘임시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전자를 비롯한 그 요소들 또한 더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 안에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로서의 ‘알갱이’가 아니라 알갱이 없이 흐르며 출렁거리는 ‘파동’뿐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물질들에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마지막 알갱이(자성: 실체, 나, 아트만, 참나, 영혼)가 없다는 이치를 불교는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공의 이치는 물질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적용된다. 사람의 마음 또한 물질에서의 수소, 산소와 성격이 닮은 수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수많은 요소들에게서도 실체로서의 알갱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법칙을 삼법인(三法印)이라는 다른 각도에서 말하기도 하는데, 삼법인은 ‘진리라는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세 법칙’이라는 뜻이다. 삼법인은 일체의 법은 덧없다(일체행무상), 일체의 법은 괴롭다(일체행개고), 일체의 법에는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일체법무아)로 구성된 불교의 진리 체계이다(이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고, 대승불교에서는 ‘일체행개고’ 대신 ‘열반적정’을 넣는다. 그러나 본뜻에는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일체행’이란 ‘조건 지어져 일어난 모든 것’을 의미하므로, 조건 지어져 일어난 모든 것은 덧없고, 괴롭다는 것이 앞의 두 법인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문제는 세 번째 법인인 일체법무아이다. 앞의 두 법인과 달리 이 법인에서는 ‘일체행, 즉 ‘조건 지어져 일어난 모든 것’ 대신 ‘일체법’이라는 다른 단어가 주어로 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行)’과 ‘법(法)’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한다. ‘행’은 ‘인간’을 의미하고, ‘법’은 ‘세계의 모든 사물’을 의미한다. 앞의 두 법인에서 덧없고 괴롭다고 언명된 내용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덧없고 괴롭다는 뜻이고, 마지막으로 언명된 내용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에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 아닌 것, 예를 들어 돌덩이가 덧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돌덩이가 괴롭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돌덩이에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삼법인에서의 일체행과 일체법의 구별이 왜 필요한가가 이 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법인은 그 가르침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의 불교계에서는 삼법인에 어긋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인 ‘불성’을 ‘참나’, ‘본래면목’ 등으로 부르면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승려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삼법인의 일체법무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일체의 법에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 안에, 또는 이 세계의 모든 것 안에 나라고 부를 만한 ‘참나’ 또는 ‘본래면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신체적으로 괴롭거나 정신적으로 번뇌할 수 없다. 또한 물리법칙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몸이나 세계의 모든 사물 속에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실체로서의 ‘나(자성)’는 없다. 돌을 돌이게 하는 실체, 물을 물이게 하는 실체, 구름을 구름이게 하는 실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아가, 나(너)를 나이게 하는 실체나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게 하는 실체 또한 없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물질 면에서 볼 때 수조 개로 이루어진 물질들의 요소가 상의상관하며 임시적으로 찰나찰나 유지되는 상태이고, 마음 면에서 보더라도 그 역시 수조 개로 이루어진 정보들이 상의상관하며 임시적으로 찰나찰나 유지되는 상태일 뿐이다. 사람 아닌 것으로서의 대한민국 또한 그러하다. 대한민국은 백만 년 전에는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며, 그 조건들은 지금 매순간마다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일 년 전의 대한민국은 일 년 후의 대한민국이 아니며, 심지어는 일 초 전의 대한민국은 일 초 후의 대한민국과 다르다. 대한민국의 오천만 명 구성원 중에 중요한 인물은 많다.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대통령일지라도 그가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게 하는 실체로서의 ‘나’는 아니다. 그는 임시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물러나는, 물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같은 존재이다. 나아가 그의 몸과 마음은 수조 개의 물질, 정신적인 요소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덧없고 괴로우며,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이 매 순간 흘러가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불교가 가르치는 진실이 얼마나 힘차고 참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부디 한국의 모든 스님들이 연기법과 삼법인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참나’라는 비불교적인 가르침을 멈추고 정법불교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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