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 - 평화로운 마음으로 머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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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 - 평화로운 마음으로 머물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5.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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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山居士

 

저는 주말에 가끔 내자의 화단 또는 텃밭 가꾸기 일을 옆에서 거들기도 하지만 이른 봄에는 매실, 복숭아, 오디, 감, 대추, 감귤 등의 과일나무의 가지치기를 합니다. 
통풍이 원활하고 햇볕이 잘 들도록 해야만 나무가 병드는 걸 막고 균형 있게 자라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바라기성 나뭇가지는 키 작은 가지에 그늘 막을 치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솎음전정을 해야 합니다.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는 꽃이 먼저 피고 나서 새 순이 돋아나지만 감귤나무는 4월 하순경 봄 순荀과 꽃눈이 거의 동시에 움트기 시작해서 연두색 새순이 약 3㎝ 정도 자라는 5월 초순경에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연두색 잎사귀 위에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습니다. 흰 감귤 꽃이 가지가지마다 촘촘히 피어나 꽃향기가 과원으로 퍼집니다. 이럴 때는 좌선을 하는 것보다 감귤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초록생명의 에너지를 들이쉬면서 이들과 합일合一됨을 느낍니다. 

아란야 과원에는 매순간 아름답게 살아 있음을 느끼고 지각하게 하는 꽃과 나무와 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따라 내 뜻대로 자연이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에선 이를 제행무상이라 부릅니다.
깨끗한 공기와 물과 같은 소중한 자연이 인간들의 무절제한 자연 착취로 인해 오염되고 그 결과 자연은 다양한 생명체들의 건강한 삶은 유지시켜 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장부》 의   <전륜성왕의 사자후 경> (D26)에서는 인류가 탐욕 때문에 타락할 경우 기근을 겪게 되고, 무지 때문에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전염병을 피할 수 없으며 증오가 타락을 부채질한다면 폭력이 사방을 뒤덮게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과 자연은 상호의존적이라는 게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우리나라의 GDP는 세계 10위 수준으로 실물경제는 선진국 수준이라고 하지만 요즘 세태에서 보듯이 전세 및 증권사기가 극성이고, 증오범죄가 크게 증가하고,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 되고, 인성교육은 부재하고, 청년들은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게다가 장기간 이어진 코로나19 체제와 그 후 글로벌 경기 위축으로 인해 내수 경기까지 침체되고 북의 핵위협까지 가중되면서 국민행복지수는 세계 최하위권에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여 어디에서 안정을 찾고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불기 2567년 5월 27일 ‘부처님오신날’의 봉축표어가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이라고 하나 마음은 본래 공하여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데 그 마음을 붙잡고 편안하다거나 불안하다거나 하는 말 자체가 혼란스럽습니다.

문득  《무문관無門關》   제41칙 <달마안심達磨安心>의 화두가 생각납니다.
“달마가 면벽하거늘, 2조(혜가)가 눈 속에 서서 팔을 자르고 말하되 ‘제자의 마음이 편치 않으니 스님께서 마음을 편하게 하여 주십시오.7’”하였다. 달마가 말하되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하게 하리라.’하였다. 2조가 말하기를 ‘마음을 찾으려고 하나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하니, 달마가 말하되 ‘너를 위하여 마음을 안심케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恒山居士

2조가 한사코 찾아내 안심시키려고 한 그 마음은 자성·청정심이 아니라 사유 분별에 의해 생겨난 이른바 망상의 생멸심일 것입니다. ​달마에서 6조에 이르는 선(禪)의 가르침은 불취외상(不取外相) · 자심반조(自心返照)가 아니겠습니까?  
‘밖으로 일체 관념의 상(相)을 취하지 말고, 놓아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비춰봐라’라는 이 명구는 <자설경>(Ud1:10)에서도 엿 볼 수 있습니다.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은 바히야(Bāhiya) 스님이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법을 설해 주소서. 오랜 세월 저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선서께서는 법을 설해 주소서.”라고 여쭙습니다.
세존께서 이르시길,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 ‘그것에 의함’이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여기 이 세상도 없고 저기 저 세상도 없으며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달콤함이나 즐김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닙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대상을 거머쥐기 위해 애쓰게 되고 휩쓸리고 머무르고 가라앉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작용은 번뇌로서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 마음의 평화가 깨진 상태입니다. 세존께서 ‘바히야’에게 하신 법문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안 것에 대하여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지 않게 되면 바깥 경계에 대해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평화란 번뇌가 없는 것(nikkilesa)을 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기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의 조건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맑고 평온하게 하고 여법하게 살면서 사람답게 공덕을 지을 때 갖추어 지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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