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 - 지금·여기 머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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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 - 지금·여기 머물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5.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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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초여름의 메신저인 멀구슬나무가 라벤더 빛의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고,  노란 황매 꽃이 떠난 마당 자리엔 빨간 양귀비꽃, 울담 곁에는 분홍색 낮달맞이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피고 지는 일은 다 제때에 초록생명들이 겪는 일이라 생경하지 않지만,   늘 이처럼 피고 지는 꽃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개는 꽃핌에만 신경이 가고 꽃 떨어짐에는 마음이 덜 갑니다. 
여러 가지 꽃들이 계절의 순환법칙에 따라 피어나면 왠지 모른 설렘에 감정은 들뜨지만 낙화를 보면 슬픈 감정이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백꽃의 처연한 낙화를 떠올리면 제주4·3사건의 영령들이 연상되면서 애잔한 맘이 그득하고, 오는 이를 마중 가는 일은 모두 반기지만 정든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은 언제나 슬픈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조건 지어진, 형성된 이 세상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달콤함이나 즐김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며 그 대상을 거머쥐기 위해 애쓰고 휩쓸립니다. 
때로는 엊그제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한탄하며 머무르고 가라앉기도 하지만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현상들에 대하여는 신경을 덜 씁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 의하면 마음은 1초에 1,200번 정도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인간들은 하루에 8시간 취침할 때를 제외하고 6천9백1십만 번 이상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셈법에 비추어 보면 어제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30%, 내일의 할 일을 계획하는 마음은 60%, 현재의 생리 작용에 마음 쓰는 일은 10% 정도로 배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스마트 폰을 보면서 새로운 정보를 쉴 새 없이 찾고 있으나 좋은 일들 보단 안 좋은 뉴스인 집 값, 취업난, 경제난, 성 갈등, 코로나 바이러스 등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들뜸과 움츠림의 두 가지 마음작용은 번뇌로서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 마음의 평온이 깨진 상태로 일종의 심리장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걱정과 근심들은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것들이겠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해법으로 서양에선 ‘카르페 디엠(carpe diem)’하라고 강조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구입니다. 라틴어 ‘카르페 디엠’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해라’는 뜻인데, 영어는 ‘Seize the day(오늘을 붙잡아라)’로 번역합니다. 

<임제록臨濟錄>에서 필자가 늘 마음에 새기는 한 구절이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새기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는 말입니다.
〈임제록〉 에서는 개념과 언어는 ‘옷(衣)’에 불과하므로 개념과 언어로부터 해방되라고 말합니다. 중생들이 사는 개념적인 세상을 해체, 분석하고 직관할 수 있다면 법(法, dhamma)은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함께 일어남을 알고 볼 수 있습니다. 
바깥 경계가 아니라 지금·여기 바로 내 자신의 존재 안에서 보이는 법(딧타담마, dittha-dhamma)을 뜻합니다. 중국에서는 ‘현법現法’이라 직역하고 영어는 ‘here and now’로 번역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세 가지 금, 즉 황금, 소금, 지금이 있는데, 그 중에서 지금이 최고다.”라고. 참선하는 지금, 염불하는 지금, 108배하는 지금, 사경하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에서 밝힌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참뜻은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 법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말입니다. 불교는 세간의 정치 논리, 경제논리, 예술이나 의술의 방법으로 중생 구제를 하지 않고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법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2,600여 년 전 비구들에게 “지금·여기 나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마음이 일어나는 지금·여기에서 함께 일어나는 법들의 무상이나 고苦나 무아를 통찰하라.”고 법문하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마음 상태[법]을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 지복한 하룻밤 경(M131) -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라’는 세존의 가르침은 갈애와 사견邪見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갈애는 성스러운 두 번째 진리인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 갈애와 사견에 끌려 다니게 되어 그 결과 마음은 과거에 정복당하지만, 현법을 통찰하는 것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것이므로 마음은 고요해지고 반야(지혜)를 증득하여 탐욕 등에 흔들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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