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주의 3대 항일운동과 해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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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주의 3대 항일운동과 해녀문화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5.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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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 (사)질토래비 이사장
문영택 - (사)질토래비 이사장

1. 제주도 3대 항일운동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제주도에서 일어난 첫 항일운동은, 1918년(무오년) 10월의 ‘법정사 항일운동’이다.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보다 5개월 앞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단일봉기로는 전국 최초이자 최대 규모로, 기미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법정사 항일운동을 비롯하여 조천만세운동(1919)·해녀항일운동(1932)을 흔히 제주도 3대 항일운동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여성항쟁으로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해녀항일운동을 낳은 제주 해녀문화의 원천에 좀 더 다가가려 한다. 


2.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에 등재되다!

유네스코는 ‘제주해녀는 감사받을 만한 물질기술로 생계에 기여해 여성의 권리를 신장했다.’라고 평하며, 제주의 해녀문화를 2016년 11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그리고 깊은 바다에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자연친화적인 물질, 물질을 마치고 몸을 쉬는 불턱에서의 달콤한 휴식과 공동체 문화,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삶의 애환을 담은 해녀노래(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무사안녕을 비는 영등굿과 잠수굿 등을 해녀문화의 정수로 꼽기도 했다. 음력 2월에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마저도 영등할망 축제의 장으로 승화한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놀랍다.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오는 이 기간에는 고기잡이도 어렵고 소라와 전복도 알차지 못하다. 이러한 이유로 선인들은 배를 띄우는 일과 바다 농사와 밭농사와 집안일도 금하는 기간으로 정하여서는, 물질과 농사에 지친 몸을 쉬게 하는 황금연휴로 삼았을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350여 개의 세계무형문화 유산 중에서 여성중심의 항목으로는 제주해녀문화가 유일하단다. 

부춘화, 한옥련, 부덕량 제주해녀항일운동가
부춘화, 한옥련, 부덕량 제주해녀항일운동가

3. 일제의 수탈에 결연히 항거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도 해안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통조림 공장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제주산 해산물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생산자인 해녀들의 삶은 비참하기만 했다. 이러한 수탈에 항거하여 1931년 말부터 1932년 사이 지속적으로 저항한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연인원 18,000여 명이 230회 이상의 집회를 벌인 끝에 일본인 도사(島司)를 한때 굴복시키기도 했다. 일제는 항쟁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을 검거하려 했지만, 해녀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1932년 1월 7일의 구좌면 세화리 해녀항쟁 그 역사적 현장으로 날아가 보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5일장이 서는 세화리 장터로 향하고 있다. 인근 여러 마을의 해녀들도 시위대에 합류하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 경찰도 어쩔 수 없을 지경이다. 초도순시 차 오는 일본인 도사(島司)를 태운 자동차가 세화리 장터 근처를 지나가자 어디엔가 숨어있던 해녀들이 동시에 나와 도사의 자동차를 에워싼다. 천여 명의 해녀와 가세한 구경꾼들에 의해 포위된 도사가, 차에서 내려 주재소 정문에서 다른 차를 타고 빠져나가려 하자 해녀들이 다시 도사를 포위한다. 게다가 바다를 건너 온 우도와 시흥리 출신 해녀 수 백 명이 만세를 외치며 합세하는 게 아닌가. 이웃 마을 해녀들도 속속 모여들어 세화리는 전시상태를 방불케 한다. 이에 힘입어 주재소 안에 들어선 20명의 해녀대표가 도사와 협상하여, 지정판매 절대반대와 조합재정 공개 등 8개의 합의사항을 발표하게 한다.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 도사를 해녀들이 에워싸며 합의사항 이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모습에 놀란 경찰이, 도사에게로 모여드는 해녀들을 강압적으로 제지하려 총 방아쇠를 당기고는 한 해녀의 목에 칼을 겨누자, 칼끝에 목을 찔린 해녀가 입을 연다.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하겠다.’


4. 야학이 활성화 된 마을 하도리와 우도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하는 야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야학교에서의 훈학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우도와 하도리 등이었다. 당시 일제의 공립학교 1면1교제 시행으로 하도와 우도에서는 마을 자체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후세교육에 임하고 있었다. 제주해녀 항일운동 시 해녀 대표였던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은 하도리 야학교 1회 졸업생으로, 문무현·부대현·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강관순·신재홍·김성오는 우도의 영명의숙 교사였다. 결국 이들 모두에게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세력, 치안유지법 위반, 가택침입, 보안법 위반, 협박, 폭력행위 등으로 형이 언도되기도 했었다. 
우도의 300여 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5일간의 양식을 준비하고,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풍선에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넜다 한다. 우도출신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제주도 해녀 노래’를 지어,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당시 우도를 비롯한 제주도 전역과 타지방에 나간 해녀들에 의해 널리 애창되기도 했던 ‘제주도 해녀 노래’의 가사 4절중 1·4절은 다음과 같다. 

1절: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해 시달리는 몸
4절: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 놈들은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없는 우리 해녀 어데로 갈까. 

이러한 해녀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하도리에는 제주해녀박물관이, 우도에는 해녀항일항쟁탑이 들어서 있다. 일제의 압제에 과감히 저항한 제주해녀항쟁은 널리 알려 기억되어야 제주의 기념비적 사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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