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삐 경 (SN1:24)
상태바
마음의 고삐 경 (SN1:24)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6.01.08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전》

[천신]

“어떠한 마음[意]이건 고삐를 죄면

거기서 괴로움은 오지 않다네.

모든 곳에서 마음의 고삐를 죄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합니다.”

[세존]

“마음이 이미 잘 제어되어 있다면

모든 곳에서 마음 고삐 죌 필요는 없으리.

그에게서 사악함이 생겨나올 때

그런 때에 마음 고삐 죄어야 하리.”





【해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마치 밭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잡초만 무성해지듯, 마음을 길들이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 마음은 타고난 그대로 거친 채로 남아 있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여기저기 방황합니다.

·본경에 나오는 어떤 천신은 유익한 마음이건 해로운 마음이건, 또는 세간적인 마음이건 출세간적인 마음이건,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다 괴로움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삐를 죄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마음은 고삐를 죄어야 할 마음도 있고, 닦아야 할 마음도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게송으로 천신을 교계(敎誡)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마음의 밭을 가는 쟁깃날과 몰이막대를 사띠(sati, 알아차림)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삐’의 사전적 의미는 소의 코뚜레나 말의 재갈에 잡아매어 물거나 부릴 때 끄는 줄을 뜻합니다. 마음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여기저기 방황하지 않도록 붙잡아 길들이는 역할을 하는 유익한 마음 작용을 빠알리 어(語)로 사띠(sati)라 부르는데, 우리말 ‘고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六境]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고유 성질이 이와 같기 때문에 마음이 어떤 대상에 집착할 때에는 반드시 동요와 혼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마음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얻기 위해 명상 수행하는 동안에도 느낌과 생각은 예고 없이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마음이란 이와 같아서 어떤 때는 좋은 생각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나쁜 생각이나 괴로운 느낌이 떠오릅니다.

·대상을 객(客)이라 하고 마음을 거울[鏡]이라고 가정한다면 밖의 형상이나 색깔이 눈[眼]의 문에 부딪쳐 시각의식[眼識]이 일어나는 것을 거울이 대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부중생의 거울에는 대상을 비추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어리석음, 부끄러움과 들뜸이라는 해로운 마음부수들이 일어나고, 또 때때로 탐욕과 성냄, 그릇된 견해와 자만, 후회와 게으름 등의 해로운 마음부수들이 뒤따라 일어나는데,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마음의 다른 작용, 즉 티끌[塵]이라고 부르는 번뇌가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는 반대되는 아름다운 마음 작용입니다. 대상을 만날 때 알아차림과 함께 있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만, 알아차림을 놓치고 대상을 만나면 마음은 이미 탐(貪), 진(瞋), 치(痴)로 오염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고 길들여야만 출가사문의 결실을 증득한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心 / citta)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識]라고 정의합니다.『법구경』에서 ‘마음이 모든 법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지어진다.’라고 말씀할 때 그 마음은 여섯 감각기관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중에서 의(意 / mano)에 해당하는 마음입니다. 즉 마노(mano)는 법을 아는 감각기관이나 기능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의문(意門)에 들어오는 객진(客塵)을 단속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마음 작용이 ‘알아차림’입니다. 간화선을 집대성한 대혜종고 선사께서 참선수행의 큰 걸림돌인 혼침(昏沈;졸음)과 도거(棹擧;망상)를 제거하는 방편으로 ‘무자화두’를 권하신 것도 마음 길들이기의 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반조해 봅니다. 세존께서는 마음을 길들이는, 마음을 개발하는 방편으로 사띠[念] ⇒ 사마타[定] ⇒ 위빠사나[慧]의 수행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러한 점차적 수행을 통해 범부중생들은 마치 참깨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처럼 궁극적 실재에서 지혜를 통해 개념을 추출할 수 있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마음이란 단지 생각, 알음알이[識]들의 연속적인 흐름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국 선종에서 말하는 본래의 마음[眞性]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