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흐마유 경 (MN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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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마유 경 (MN 91)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6.01.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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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오백 명의 큰 비구 승가와 함께 위데하에서 유행하셨다. 그 무렵 미틸라에 살고 있는 120세 된 브라흐마유 바라문은 세존을 뵙기 위해 세존께 다가가서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브라흐마유 바라문은 세존의 몸에서 서른두 가지 대인상을 살펴보았다. 그는 세존의 몸에서 서른두 가지 대인상들을 대부분 보았지만 두 가지는 볼 수 없었다. 포피에 감추어진 음경과 긴 혀, 이 두 가지 대인상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했다.

2. 그때 브라흐마유 바라문은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고따마시여, 저는 서른두 가지 대인상을 배웠지만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존자의 몸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인간이시여, 존자의 음경은 포피에 감추어져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혀는 아주 깁니까? 선인이시여, 조금만 드러내어 의심을 제거해주소서.”

3.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이 바라문은 내 몸에서 서른두 가지 대인상들을 대부분 보지만 포피에 감추어진 음경과 긴 혀, 이 두 가지 대인상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지고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는구나.”

그러자 세존께서는 브라흐마유 바라문이 포피에 감추어진 음경과 긴 혀를 볼 수 있도록 그런 형태의 신통변화를 나투셨다. 그 다음에 세존께서는 혀를 빼서 두 귓구멍을 이쪽저쪽 문질렀고 두 콧구멍을 이쪽저쪽 문질렀고 온 이마를 혀로 덮으셨다.

4. 그리고 세존께서는 브라흐마유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서른두 가지 대인상을 배웠고 내 몸에 그 모든 것이 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시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내게서 버려야 할 것을 버렸으니

바라문이여, 그러므로 나는 부처입니다.”





【해설】

·부처(buddha)의 사전적 의미는‘대도(大道)를 깨달은 성자’란 뜻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를 깨달았다고 해서 부처라 부릅니다. 사성제와 연계할 때. 본경에서‘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이라 함은 명지와 해탈을 말하고,‘닦아야 할 것’은 도(道)의 진리를 말하고,‘버려야 할 것’은 일어남[集]의 진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경에서‘알아야 할 것’이란 일반적으로 교학으로서의 법(蘊-處 -界-根-諦-緣)을 말하고,‘닦아야 할 것’이란 수행으로서의 법(37보리분법)을 말합니다.‘버려야 할 것’이란 갈애, 오염원을 말합니다.

·세존께서 45년간 이 법(Dhamma)을 가르치셨기에 가장 위대한 법왕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전법륜을 시작으로 열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금구옥설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후학들이 만들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후 26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문화와 역사에 따라 숱한 사람들이 삼장(經-律-論)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침의 크기와 종류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 정등각이 되려면 교학과 수행의 양 날개로 번뇌를 끊고 닦는 행위를 강조하는데, 다른 한편 중국 선종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강조합니다. 이는 바로 여래장(如來藏) 또는 불성(佛性)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상으로,‘성품을 보면 곧 그대로 부처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육조 혜능의 수행론은 근본적으로 거울(마음)에는 한 물건도 없다(無一物)는 인식론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닦고 끊어야할‘대상’이 없기에 수행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룰 뿐이므로 견성(見性)이 중요할 뿐,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대상에 대한 관찰(위빠사나)이나 집중된 알아챔으로서 새김(sati) 등의 수행기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이 초기불교의 법(法)이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북방불교의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성(性)이란 개념에 그 철학적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중국 송(宋)대 당시의 간화선을 그대로 계승하면 1,000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불교의 세계화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는지 반성해 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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