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경 (stn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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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경 (stn 1:6)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6.02.1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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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세존께 다가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세존께 시로써 여쭈어보았다.



[천신]

“저희는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고따마 존자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파멸의 문은 어떤 것입니까?”



[세존]

1.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은 파멸합니다.

2. 참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고, 참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며,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을 즐기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3. 수면에 빠지는 버릇이 있고, 교제를 즐기는 버릇이 있고, 정진하지 않고, 나태하며, 화를 잘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4. 자기는 풍족하게 살면서도 늙게 되어 젊음을 잃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5. 성직자나 수행자, 혹은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6.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황금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7. 혈통에 자부심이 강하고, 재산을 자랑하며, 가문을 뽐내고, 자기의 친지를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8.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9.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10. 왕족의 가문에 태어나더라도,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켜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해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태어난 자는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인과법칙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무엇이 되며, 어디로 가냐’ 하는 의문은 까마득한 옛적부터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마치 나무가 그 모든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이생에서 누리던 갖가지 희로애락을 다 버리고 갑니다.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나면 이미 잘못 산 것입니다. 죽음의 마음에 염라대왕의 모습이 나타나고 다음에 몸을 받을 곳이 인간계보다 낮은 삼악도일 것이라는 징표가 나타난다면 금생에서 지혜의 광명을 찾아 팔정도를 닦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몸의 때가 많이 묻은 삶, 탐·진·치 삼독에 물든 삶을 살았다는 것이 됩니다.

·옛 스승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을 계속된다.”라고. 그 업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것인데, 그 뿌리는 잘못된 습관, 버릇입니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반복적 습관적으로 저지른 행위(업)가 재생 연결 시에 우선적으로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이 ‘청정도론’의 저자인 붓다 고사스님의 경책입니다. 습관(bahula)이란 뜻은 밥 먹듯이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습관이 몸에 스며들면 살생, 절도, 음행, 거짓말, 음주와 도박을 하는 것이 파멸로 가는 길임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끼리끼리 어울려 이를 즐깁니다.

·이런 습관을 고치지 않고 죽음을 맞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점에 대하여는 초기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A8:40)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흡연 인구가 줄어들지 않고, 음주문화가 교제의 필수품이 된 것도 다 습관 때문입니다. 습관을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작심삼일에 그치고 맙니다.

·수행은 마음이 일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 버릇을 고쳐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선방에서 참선을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초기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경전을 읽고, 또 참사람(眞人)이라고 불리는 큰 스님께 법문을 권청하는 것은 수행의 첫 걸음이 됩니다. 청신사와 청신녀들이 숲을 이뤄 법담(法談)을 나눈다면 일보 더 정진하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재가의 오염된 삶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재가의 삶은 늘 그 자신을 나태와 무기력에 빠지게 합니다. 수행의 가속도를 유지하려면 숙련과 반복적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던 일손을 멈추고 잠시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보십시오. 그런 후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마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나의 마음가짐은 어떠한가?”이런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들린다면 파멸의 문은 폐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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