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하는 사찰순례 12. - 영주 봉황산 부석사(浮石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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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하는 사찰순례 12. - 영주 봉황산 부석사(浮石寺) (2)
  • /제주불교
  • 승인 2016.02.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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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의 정전인 무량수전의 오른쪽 뒤쪽에 작은 전각이 있다. 최근 다시 중건한 한 칸짜리 작은 집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무량수전이나 조사당에 비하면 단청, 기둥, 지붕이 너무 새 것이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안밖에 그려진 벽화의 주인공은 다른 절 불화에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여인이다. 선묘각(善妙閣)이라는 절집 이름도 낯설다. 하지만 선묘각의 주인공 선묘는 결코 낯설어서는 안 되는 여인이다. 원효나 의상대사처럼 큰 스님은 당시 사가의 여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가 원효를 사모한 것처럼 선묘라는 중국 여인은 신라에서 유학 온 의상을 사모하였다. 클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엘리트였던 원효와 의상에게서 두 여인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무엇인가를 느꼈던 것 같다.

송고승전과 일본에 전하는 화엄종조사회전에는 선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661년 의상이 당나라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산둥반도 북쪽 등주에 도착해 어느 집에 이르러 머물기를 청하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 집 주인은 의상의 비범함을 보고 계속 머물게 하였다. 선묘는 그 집의 딸이다. 그녀는 자기 집에 머무는 의상의 뛰어남을 보자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 의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굳은 의지로 공부하러 온 의상은 여인을 멀리해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적산에 있는 신라의 절인 법화원으로 거처를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할 때 선묘는 멀리서 의상을 보며 흠모하는 마음을 더욱 키웠다. 선묘는 의상이 절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려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만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의상은 등주와 멀리 떨어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서 종남산의 지엄대사 문하에서 10년간 화엄경을 공부한다. 신라 국왕이 의상이 귀국해서 불교를 널리 펴기를 청하자 의상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가 의상을 위해 손수 만든 법복을 전하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자신이 들고 있던 법복이 의상에게 전달되기를 염원하며 배를 향해 던지고, 자신은 바다로 뛰어든다. 의상이 장안에서 공부하는 동안 선묘는 의상을 그리워하면서 그가 도를 깨치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의상이 고국으로 떠나자 함께 갈 수 없는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서 의상이 탄 배가 신라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게 보살피고자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자신의 염원대로 용이 되어서 의상을 태운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배를 보살폈다.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이후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잘 이뤄지는 것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른채 지냈다. 낙산사를 세운 이후 다음에 세운 절이 부석사이다. 부석사 터 인근에는 다른 종파의 승려들 500여 명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서 절을 짓는 데 반발하였다. 의상이 그들의 반발에 절 짓는 것을 힘들어 하자 하늘에서 용이 된 선묘가 바위로 변해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500여 명의 승려를 향해 위협하니 결국 그들은 의상이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한다. 바위가 된 선묘가 땅에 내려앉은 것이 바로 부석(浮石, 하늘에 뜬 돌)이며, 선묘의 도움으로 절이 지어졌기에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의 의상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관련된 유적으로 무량수전 오른쪽 뒤에 있는 선묘각, 무량수전 왼쪽의 부석, 우물인 선묘정과 무량수전 지하에 묻혔다고 전하는 석룡이 있다. 무량수전 뒤편에 있는 선묘각을 지나 100미터 정도 가면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이 나온다. 비록 1300여 년 전에는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만 가면 서로 만날 수 있다.

이 의상과 선묘의 사랑이야기는 송고승전에 전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해동화엄종의 최초로 모시는 의상과 관련된 이 이야기를 일찍부터 두루마리에 그림을 그려 전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일본 화엄종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묘에(明惠)화상이 원효와 의상의 화엄학 관련 글들을 읽고, 그들을 흠모하여 그들의 행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이다. 아래 그림은 의상을 태운 배가 떠났음을 알고 바다에 뛰어드는 선묘와 의상이 탄 배가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도 안전하게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용이 된 선묘가 보호하는 장면이다. 전체 그림 중 가장 절정인 장면 중 하나로 그 속에 깃든 선묘의 애틋한 사랑을 생각하면 사뭇 마음을 숙연케 만든다. 아마도 일본의 묘에상인은 자신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당나라를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과 그와 불법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묘의 깊은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아 이것을 만든 것 같다. 사랑은 과거든 현재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석사에 가면 선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음미하며 자신은 사랑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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