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業의 알아차림’으로 윤회 사슬 끊는 길로 가자
상태바
‘業의 알아차림’으로 윤회 사슬 끊는 길로 가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0.23 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소연 _ 중앙승가대학 문화재학 교수/
 강소연 교수는 30여년간 불교문화재를 연구한 전문가로 국내의 무수한 문화재와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도 10여 년간 조사하였다. 특히 불교 문화재와 관련하여 이론과 수행을 접목시킨 탁월한 해설로 불교학 전문강사로도 인기가 높다. 이번에 선덕사에서 주최하고 제주불교청년회(회장 김보성)가 주관한 <제제불교문화강좌>에서 강 교수는 불화중 <지옥도>를 중심으로 불교문화재를 강의하면서 오랜 시간 수행과정에서 방황하다가 길을 찾은 이야기를 핵심적으로 들려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강 교수의 구도행과 강의내용을 스케치하여 중심적인 내용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 편집자

삼악도 나락에서 無明 벗기는 지장보살
지옥 방편 가르침이 유신견 없애고    
아나빠나사띠 수행이 무아연기 꿰뚫게 해
12연기 각성하면 업의 근원 소멸시켜

 나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인가? 내가 형체로 존재하기 이전이나 형체로 존재하는 지금, 그리고 형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이면에서 존재의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개체적 자아가 있어 이것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를 착각이라고 한다. 내가 ‘존재(存在)한다’는 착각, ‘있다(有)’는 착각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어리석음(痴)’이라고도 하고, ‘근본무명(=有身見)’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교의 존재론은 “무상(無常) .고(苦) . 무아(無我)”를 근본 성품으로 이해한다. ‘항상하지 않음(無常)’은 우리가 태어나 생장하다가 늙고 병들고, 형체가 허물어지고 자연만물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생로병사의 고통만 보아도 인생의 고(苦)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무아(無我)’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이름과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주체(實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없다(無我)’고 한다면 그렇다면 누가, 또는 무엇이 사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無我’를 말하지만, ‘나’를 존속시키는 이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조건’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또는 ‘무엇’이 결정한 것인가? 
대장엄경론에는 이러한 무아설을 듣고 친교 바라문이 의심하면서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면, 윤회에 있어서 누가 후세에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제석천이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세에 번뇌로 말미암아 여러 ‘업(業=karma)’을 지은 까닭에, 그 업에서 현재의 몸이 생겼거니와, 현재에 있어서도 다시 업을 짓는다면, 내세에서 다시 거기에 해당하는 몸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자아가 없으면서도 ‘업보(業報)’의 어김없음이 이 씨와 새싹의 관계와 같다.”  
업에 의한 ‘윤회(輪廻)’는 인간이 죽어도 그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육도 중 첫째는 지옥도(地獄道)이고, 둘째는 아귀도(餓鬼道)이다. 셋째는 축생도(畜生道)이고, 넷째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이다. 다섯째는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이고, 여섯째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이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내세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이 ‘윤회설’을 믿는다. 
부처님의 눈으로 본 존재의 실제 모습이 이러했다. <부처가 되다: 阿惟三菩提品 제14>『붓다차리타(佛所行讚)』에서 다음과 같이 설했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한 지장보살본원경변상도(일본교토 지은원소장)를 중심으로 지옥도를 설명하고 있는 강소연 교수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킨 뒤에 다시 
저 중생들을 관찰하니
여섯 갈래 속에서 윤회하면서
나고 죽음의 끝이 없네
그것은 거짓이고 견고하지 못하여
마치 파초 꿈 환영(幻影)같네
이어 한밤중에
깨끗한 하늘눈(天眼)을 잇따라 얻어
일체중생을 관찰하기를
거울 속 모양 보는 듯하니
중생의 삶과 나고 죽음, 귀천과 부귀는
청정업(淸淨業)과 청정하지 않은 업(不靜業, 惡業)
그것에 따라 즐거움(苦樂)의 과보(報)를 받네.

그렇다면 과연 ‘중생’과 ‘속세’를 만들고 움직이게 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업(業)이다. <부처가 되다: 阿惟三菩提品 제14>『붓다차리타(佛所行讚)』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쁜 업(惡業)을 지은 이 관찰할 때 
반드시 나쁜 갈래(惡趣)에 태어나고
좋은 업을 닦아서 익힌 이 
인간이나 천상(人天)에 태어난다. 
만일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한량없는 갖가지 고통 받나니(중략) 
이런 지극한 고초를 받지만 
업행(業行)은 그를 죽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업’이란 무엇인가? 업은 ‘업식(業識)’이라고도 하고, ‘에너지의 패턴’이기도 하며 일종의 덩어리지음이고, ‘마음’이라고도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마음’을 살펴보자. 우리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한다. 깨어 있을 때는 우리가 ‘의식’이 있지만,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없고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무의식이 업이며 업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은 없어지지만 무의식은 남는다. 이 무의식에 바로 윤회를 일으키는 업으로 인한 ‘갈애’의 결과가 담겨 있다.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마음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六識) 외에 더 심층인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있다고 하며, 깨달음의 중득인 환멸연기의 측면에서 말나식(末那識)은 평등성지(平等成智)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완전히 변형되어 전식득지(轉識得智)가 이루어지며, 이 마음 상태가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영혼(soul)’이라는 의미로 이 무의식을 인식하는데, 불교에서는 한 단계 더 분석해 들어가 업의 구조를 해체하여 보고 있다. 이 업을 해체하면 12연기(緣起)가 뚜렷이 보인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6처(處)가 있고, 6처로 말미암아 촉(觸)이 있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取)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有)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生)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 · 우(憂) · 비(悲) · 고뇌(苦惱)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긴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므로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므로 6처가 멸하고, 6처가 멸하므로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므로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므로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므로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므로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므로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므로 노사 · 우 · 비 · 고뇌가 멸한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한다.’ <위나야 피타카 大品1, 菩提樹下緣>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위대한 선언을 한다. 즉 “나는 이제 윤회의 사슬을 끊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업을 소멸시키고 ‘윤회’의 사슬을 끊을 것인가? 
‘업’은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으로 나눈다. 선업은 극락, 즉 부처와 보살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불선업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육도윤회의 길이다. 
그렇다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있냐(有我)’와 ‘없냐(無我)’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있다고 보는 관점의 ‘유신견(有身見)’에서는 ‘욕망(갈애)’ ‘무명(無明)’의 마음이므로 ‘공덕’이 없는 마음으로 불선업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관점에서는 이 무명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 ’각성(覺性)‘, ’깨달음‘,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며, ‘사티’가 바로 이것을 ‘알아차림’ 할 수 있다. ‘사티(sati)’는 팔리어로 팔정도의 ‘정념(正念, sammā-sati)’을 말한다.(서양에서는 사티를 Mindfulness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은 외도의 선정수행과 고행을 바른 수행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그 수행법에는 ‘선정(사마디)’은 있지만 ‘정념(正念, sammā-sati)’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념’이 없는 ‘선정’은 ‘삼마사마디(sammā-samādhi)’ 즉 팔정도의 ‘정정(正定)’이 아니다.) 부처님은 아나파나사티, 즉 들숨날숨을 보는 고도의 정신집중(사티)을 통해 모든 번뇌를 벗어나 누진통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고 하였다. 나도 많은 길을 헤매다가, 부처님이 직접 하신 방법, 즉 아나빠나사띠를 통해 올바른 길을 찾게 되었다. 

 

‘지장보살본원경’에 지옥(地獄)이란 악업의 힘으로 생겨난 곳이라고 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 원본에는 나라카(naraka)라고 하며, 이를 한문으로 ‘나락(奈落)’으로 음역하였다. 그런데 <지장보상본원경>에 따르면 “나락, 즉 지옥에 떨어지면 수천 겁을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고 한다. 즉 지옥은 지혜가 없어서 스스로 각성하기 어려운 나락인 것이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이 나락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본래 바라문 가문의 딸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지옥행을 향한다. 큰 지옥은 열여덟개로, 무간지옥(아비지옥), 규환지옥, 흑암지옥, 발설지옥, 팔열지옥, 팔한지옥, 고독지옥, 협산지옥, 정철지옥, 거해지옥, 철상지옥, 도산지옥 등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육도중생(六道衆生)을 교화하겠다는 큰 대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대비보살)이다. 지장보살의 이러한 서원은 <지장보살본원경>에서 인과법과 생사윤회, 업에 대한 설명에 잘 나타나 있다.  
보통 사찰탱화에서 불선업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 영단(靈壇)이다. 불자들은 보통 죽은 영혼이 육도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곳으로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천도재를 지낸다. 특히 지옥이나 아귀, 또는 축생에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지옥도는 보통 지장보살도의 하단에 그려지는데, 지장보살은 ‘여의주’와 ‘석장’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장십륜경>에 의하면 ‘여의주’는 “그 광명으로 인해 병이 있는 자 모든 병이 낫고, 죽게 되거나 결박되어 옥에 갇힌 자들이 모두 풀려나고, 몸과 말과 뜻이 거칠고 무겁고 더럽고 탁한 자들도 모두 부드럽고 청정함을 얻고... 가지가지 형벌로 고통당하는 자가 이를 모두 여읠 수 있다” 
<지장경계청>에서는 ‘석장’에 대해 “자비스러운 인으로 선근을 쌓아 맹세코 중생을 구제해내는 지장보살이 손 가운데 가진 금석주장을 떨치면 지옥문이 스스로 열리고,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의 공명은 널리 대천세계를 비추나니.” 라고 설하고 있다.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에는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들어 사대육신 흩어지고 업식만을 가져가니 돌고 도는 생사윤회 자기 업을 따르오니 무명업장 밝히시면 무거운 짐 모두 벗고 삼악도를 뛰어넘어 극락세계 가오리다.” 라고 하고 있다. 즉 업장을 밝혀 무명을 넘어 깨달음에 이르면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 열반의 길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