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대한 고전적 해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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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대한 고전적 해석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2.1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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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일러주신 열반에 대해 그 해석을 두고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인류의 사상과 철학이 발달하면서 부처님이 말하는 열반의 설명이 애매하고 원전의 부정확성이 빚은 결과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열반이 갖는 함축적 의미에 대해 자신의 사유방법이나 철학적 견해로 설명하는 경향을 지녔고, 결국 수많은 해석의 다양성을 낳았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기호와 사색 스타일에 따라 서로 다른 내용을 주장하거나 새로운 개념과 내용을 창조하기도 하고, 일부 대승불교 철학자들은 원전의 내용을 삭제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대승경전은 창작경이므로 비불설이다는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대승 논사인 나가르주나(용수)는 베단타철학파인 우파니사드의 상카라(Sankara, 700~750추정) 철학을 부처님의 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열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해를 위해 불자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선사들의 게송이나 화두선에 대한 집념처럼 열반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많을수록 불심을 풍부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 <편집자 주>

붓다고사 인도 부다가야 지방 사람으로 430년경 실론에 건너간 상좌부 불교 계통의 불교학자이다. 일설에 의하면 브라만 출신이라고 하며, 불교에 귀의하여 삼장(三藏)을 배웠다고 한다. 실론(스리랑카)에 건너간 후 대사(大寺)에 거주하면서 그 절에 소장되어 있는 성전을 팔리어로 번역하였고 또한 팔리삼장에 대한 주해를 완성하였다. 만년의 활동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도에 돌아왔다고도 하고, 미얀마로 갔다고도 전해진다. 오늘날의 스리랑카 불교 형태는 이러한 교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위숫디막가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상좌부에서는 열반을 “개념작용이나 추론적 사고가 없고, 무한하며, 원인도 없고, 관련도 없으며, 볼 수 없고, 영향도 없으며, 물질적 형태없이 초자연적이며, 지성이 아니고, 파생되지도 않으며, 기쁨을 주지도 않고, 기쁨이 동반하지 않으며, 편안하거나 무관심하고, 어떤 것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아라한을 표현하는 ‘무학(無學)’도 아니고 ‘무위(無爲)’에 가깝다고 한다. 
목갈리뿟따띳사(기원전 327〜247)가 지었다는 <까타왓투>에는 열반이 “영구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소연(武所緣)’이나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것으로 해석했다. 
밀린다왕문경에는 열반을 “긍정적이고, 출세간적으로 영원하고, 지극히 행복이 넘치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것은 경험될 수는 있지만 설명은 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붓다고사(5세기경)는 열반을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고, 죽지 않음, 혹은 편안함을 작용으로 하며, 표상 없음, 혹은 망상 없음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열반이 비존재가 아니며 열망이 부재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유여(有餘)’나 ‘무여(無餘)’라는 용어도 열반에 대해 단지 부수적인 개념일 뿐이며 경험은 가능하지만 형언은 불가능한 본질이라고 했다. 
아누룻다짜리야(11~12세기경 승려로 추정)는 “열반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궁극이고 실현할 수 있고 독특하다. 도닦음의 결과로 인연되어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상좌부에서는 열반이 긍정적이고 경험될 수 있고, 형언은 할 수 없으며, 가장 가치 있는 궁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부아비달마(바이바시카)는 세 가지 소멸에 대하여 이해시키고 있다. 세 가지 소멸이란,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과 멸진(滅盡)인데, 택멸과 비택멸은 무위인데, 멸진은 유위로 해석한다. <아비달마발지론>에서는 택멸을 ‘모두 벗어난 것’으로 해석한다. 멸진은 모든 활동, 즉 행(行)의 균열, 중지, 붕괴, 소멸, 여읨이다. 이중 택멸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한다. 유부아비달마의 해석에 따르면 열반은 실재하며 영원하고 법상(法相)이 중지된 채 계속되는 법자성(法自性)이다. 그래서 이 학파는 열반이 순수한 정신적 원리가 존속되는 것으로 믿었다. 또한 비인격적이고, 일체의 본질이 심오한데, 이성적 사유로는 확인할 수 없고, 활동으로 경험하는 요소의 비세속적인 본질이라고도 설명했다. 
경량부에서는 대체로 열반을 부정적인 ‘정지’의 특성으로 이해했다. 동시에 완전히 정지하는 수준으로 바뀔 때의 섬세한 의식은 존속한다고 믿었다. 
유식학파(유가행파)는 “보살은 변화에 의해 대반열반(大般涅槃)을 얻는데, 열반은 그 본성이 청정하지만 구름에 가린 달처럼 도(道)의 바람이 그 우연한 덮개를 소멸시켜야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경량부의 <성유식론>에서는 열반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① 무시청정열반(無始淸淨涅槃)은 열반이 그 자체로 청정하다고 한다. 무수하고 무한하고 탁월한 특성을 띠며, 생멸에서 자유롭고 우주처럼 모든 존재에게 동등하고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법과 동일하지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니밋따(표시, 相)’와 ‘위깔빠(分別)’에서도 자유롭고 언어를 넘어서며 그 안에서 실현되고 영원히 고요한 진여(眞如)이다.
② 유여열반(有餘涅槃)은 번뇌의 덮개를 벗어난 진여로 표착(漂着)은 남아 있지만 미세한 괴로움을 뒷받침하는 응보의 다르마는 끝나지 않은 상태다. 
③ 무여열반(無餘涅槃)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진여로 번뇌는 멸하고 표착도 모두 고갈된 상태다. 
④ 무주열반(無住涅槃)은 소지장(所知障=탐진치로 업의 속박에 머물게 하는 장애)에서 자유로운 진여로 대비(大悲)와 대혜(大慧)의 지원을 받는 상태다. 그래서 지혜로 인해 윤회에 걸리지 않으며, 대비로 인해 열반에 안주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는 궁미래제(窮未來際=모든 미래가 다함)이고, 항상 고요함이다. 이러한 열반은 무시청정열반의 정신적 경험에 따라 연이어 나타나며 이것이 영원한 열반이다. 

상카라 (Sankara, 700~750)오늘날 인도 사상의 주요흐름은 그의 학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브라마 수트라 Brahma-sutra>와 주요 <우파니샤드 Upanisads>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유일하고 영원불변한 실재인 브라만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다양성과 차별성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상카라의 문체는 명쾌하고 심오하며, 날카로운 통찰과 분석 기술이 그의 저서의 특징이다. 진리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논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 철학자라기보다는 뛰어난 종교적 스승으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를 보면, 그가 정통 브라만교 전통에 통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승 불교에도 정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불교 사상보다는 오히려 무신론적 이원론 철학 체계인 상키아 요가 학파와 비슷하다. 상카라는 히말라야 산맥의 케다르나트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가 창시한 불이일원론적 베단타 학파는 그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우세한 철학파이다.


그래서 열반은 궁극의 본질적 실재이고 청정한 법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열반과 윤회 사이의 궁극적 차이는 없다. 즉 귀속된 차원에서 인과적으로 의존하는 요소는 현상적인 삶을 이루게 되고 절대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요소는 열반을 나타낸다. 윤회에서 열반으로의 전환은 관점의 변화인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본질에 집중하게 되면 여기에 완전히 몰두한다. 이것은 현상적 요소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붓다로 변모(轉依)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신(法身)’이며 ‘희론적멸(戱論寂滅)’로서 요소의 고유 본질을 넘어서서 ‘영원히 고요’한 것이다.
중관파는 일종의 회의론자들로 평가된다. ‘공’이라는 개념은 각각의 사물과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비록 이 세상이 감각과 지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질적 용도로서는 유용하다는 것을 알려 줄 목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에 대해 모든 생각이 변증법적이고 모순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절대적 실재나 독립된 실재가 개별적이거나 유한한 개체에 속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법’을 자성을 지닌 ‘공’이라는 귀결에 이르게 한다. 
용수는, 열반에 대해 존재와 비존재가 여래(如來)처럼 죽음과 자아를 넘어서는 초월적 주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침묵한 부처님의 전통에 대해 철학적 일관성을 보인다. 즉 확정을 요구하는 질문은 적당하지 않기에 부처님은 침묵을 지킨 것이고, 그래서 열반은 비존재적이지 않으며 조건 지어지지 않고 원인 없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당연히 존재일 수도 없게 된다. 존재와 비존재는 다 조건 지어지는 것인 반면, 열반은 조건이 없으므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단지 그래서 열반은 ‘완전히 좋은 영원한 정지’라고 말한다. 

이상의 고전적 해석들을 살펴보면 불교의 열반은 적멸(寂滅)의 빈 공간이라고 보고 있지 않으며, 경량부에서는 미세한 정신적 의식이 잔존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또 각 학파들은 열반과 무위에 대한 특성은 대부분 견해가 일치된다. 즉 열반은 영원히 원인과 조건의 경계지음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화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적절한 표현을 할 수 없고 오직 직관으로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반은 궁극의 선으로 모든 동요(動搖)와 수고로움이 끝난다. 그래서 ‘형언키 어려운 영원한 평화’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설명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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