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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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2.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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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10주기 추모 특집

끝내 이루지 못한 삼고초려의 추억
3월 11일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몇 년 전부터 필자는 당시 기자로서 인터뷰 요청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2007년 늦가을쯤  폐암이 발병했던 법정 스님이 강원도 토굴에서 내려와 길상사로 오신다는 정보를 얻고는 원로였던 서영훈 선생(전 적십자사 총재, 전 KBS사장)을 대동하고 성북동 길상사로 향했다. 
법회를 마친 스님을 만나 이 시대의 행복을 위한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완곡하게 요청을 거절하며, 강원도 토굴에서 폐암투병중이라 세상 일에는 더는 관여치 않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 또 강원도 토굴에서 내려와 길상사 법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다시 길상사로 향했다. 이때도 역시 스님은 건강 문제도 있고, 일체의 세상 일과의 절연을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2008년 늦가을, 법정 스님이 다시 길상사로 오신다는 정보를 얻고 세 번째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찾아갔다. 예전에 비해 수척한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인터뷰를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다시 강원도 토굴에서 몇 달간 정리를 하고 오신 연후에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 그렇게 기다림의 세월이 지났고, 인터뷰는 끝내 성사되지 못한 채 스님을 다시 뵌 것은 입적직후 길상사 지금의 추모당에서였다. 아마도 제주도에서의 요양생활에서도 회복되지 못하여 끝내 약속을 지키실 수 없었으리라. 
여러 해를 폐암의 병마와 싸우던 말년에 쓸데없이 세상에 필업을 남겼다며 당신의 저서를 모두 절판하기를 원하셨던 법정스님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인터뷰에 목매었을까? 
그 이유는 여전히 난세인 세상에서 스님의 맑은 향기로움으로 위로를 받고자 했던 열망이었다. 
그때 스님은 세상에 이런저런 생각은 그동안 책에 다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인터뷰를 피하셨다. 그러나 기자란 오롯이 직접적인 대화를 소유하고자 열망하는 욕심이 늘 문제가 된다. 다른 곳에서 남긴 이야기는 나와의 대면적 글이 아니라는 결벽증이다. 
이제는 아무리 삼고초려를 하려고 해도 스님의 육성은 지나간 영상법문에서나 찾을 수밖에 없다. 다시 그 시절의 영상법문을 듣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게도, 지금의 상황에서도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다. 입적 10주기를 맞아 스님의 법문을 조금이나마 지면에 옮기면서 그리움을 달래본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깨우침과 은혜를 입고 계실 줄 믿습니다. 제 자신 가끔 생각하는 일인데 ‘만약 불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상상을 할 때 그 은혜에 대해서 거듭거듭 고마움과 다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불법인지, 한 번 돌이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고 해서 출가 제자라 할 수 있는가? 또 절에 어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동참한다고 해서 재가 신도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불자이고 부처님 가르침인지 오늘 같은 날 한번 돌이켜봐야 할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후기에 결집된 대승경전과는 달리 불타 석가모니 인간 면모들이 소상히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여시여경>, ‘이와 같이 들었다’는 여시여경에 이런 법문이 실려 있습니다. 원문에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구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만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추상 용어입니다만, 검찰이나 판사들이 쓰는 법하고 달리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평소에 가르쳐 준 교법,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절에 다닌다고 해서 불자일 수 있는가. 겉만 봐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오는 이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기 위해서 한자리에 이렇게 모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과연 이런 것이 바른 불교를 위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기회에 곰곰이 한 번 되새겨 보아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따라서 진정한 불자일수도 있고 사이비 불자일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준엄한 가르침입니다. “설사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하더라도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스님들을 가까이 하고 집안 살림도 내젖혀놓은 채 절이나 교회에 자주 다니는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그 가운데는 절이나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마음씀이 훨씬 못한 경우가 많아요. 절에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그대로 일상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자기 신앙생활과는 상관이 없는 불필요한 말들, 이 말 듣고 저리 옮기고 저 말 듣고 이리 옮기고 하는 사람들이 절이고 교회고 많이 있습니다. 신도뿐이 아니고 스님들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계기에 우리가 반성해야 해요. 어떤 것이 진정한 불자모습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되돌이켜 보지 않고 등만 켜고 불공만 하고 기도만 하고 헤어진다면 부처님 오신 날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진짜 불자인지 가짜불자인지 판명됩니다. 경전에 계속 이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내게서 천리 밖에 떨어져있을지라도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품지 않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지 않고 도심(道心)이 견고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고, 나 또한 그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는 그런 교훈이에요. 스승 제자사이건 또는 연인사이건 또는 부부사이건 한집에서 한도량에 살더라도 뜻이 같지 않으면 그건 십만 팔천리에요. 뜻이 같아야 한 가족을 이루고 한 가정을 이루고 또 한 도량을 이룹니다. 불타 석가모니와 우리 사이는 시간으로 이천오백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 놓여있습니다. 또 인도와 우리나라는 거리가 수만리 떨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일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아있는 교훈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천오백 년 전 어떤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대중에게 한 설법이라 하더라도 그 교훈이 살아있다면 지금 바로 현장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죽은 교훈은 과거완료형이에요. 이미 과거로 끝난 겁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교훈은 늘 그때 그 모습으로 현재진행하고 있습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곧 법을 본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나는 늘 함께 한다.”  

이 가르침을 깊이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날이 단순한 부처님 오신 날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순간순간 부처님이 우리 앞에 오시는 날이 되어야 우리가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신 날로 그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우리 앞에 늘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깨어있다면, 평소 부처님 가르침, 경전을 그대로 수지독송하고 있다면, 그런 교훈이 몸과 마음에 배어있다면, 부처님과 우리 자신은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말입니다. (2008년 부처님오신날 법문)
 

 

법정 스님 행장기-----------------------
법정 스님은 1932년 11월 5일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났다. 우수영 초등학교와 목포상업중학교를 거쳐 전남대 상대를 중퇴하였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55년에 출가를 결심하여 오대산으로 가려 했으나 눈길로 차가 막혀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엔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에는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였다. 1972년에는 첫 에세이집 <영혼의 모음>을 출간하였다. 1973년 함석헌 선생이 주도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5년에는 인민혁명당 사건이후 송광사 자정암 터에 토굴을 지어 홀로 살았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고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냈으며, 이 무렵인 1976년에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무소유>를 발간하였다. <무소유>는 370만 권이 판매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후 17년간 불일암에서의 생활을 이어갔으나, 그곳에서의 수많은 저서 집필로 인해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면서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게 되었다. 이에 법정은 1992년 4월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 정진하게 되었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독립기념관과 창덕궁 부용정 연못의 연꽃이 모두 뽑혀졌다는 사실을 접하고, 그 어이없는 심정을〈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주창하게 된다. 맑고 향기롭게는 1996년 12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고, 법정스님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보살이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기를 밝혔고, 몇 차례 고사하던 스님도 주변의 권유로 이를 받아들여 후에 조계종 산하 길상사로 창건하였다. 
1997년 12월 14일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직책을 사임하고, 길상사의 봄, 가을 두차례 법회만 참석하기로 한다. 그러다 2007년부터는 폐암이 발병해 여러 차례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2009년 겨울에는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요양했지만, 병세가 악화돼 서울 강남구의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였다. 2010년 3월 11일 오전 길상사 행지실로 옮겨졌고, 오후 1시 51분에 입적하였다. 법정 스님의 장례는“많은 사람 수고만 끼치는 일체 장례의식 하지 말라”며 관이나 수의를 마련하지 않고 승복 입은 그대로 다비하라는 평소 뜻에 따라, 영결식 등 별도의 장례절차 없이 진행되었다. 3월 12일에는 스님이 수행했던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운구해 13일 오전 11시에 다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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