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 뽑은『이띠웃따까』(Itivuttaka, 如是語經) (3) 어리석음 경(It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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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이띠웃따까』(Itivuttaka, 如是語經) (3) 어리석음 경(It1: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0.2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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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주석서』에서 전해지는 쿳줏따라(Khujjuttara)는 선천성 꼽추이자‘꼬삼비’나라의 사마와띠 왕비의 하녀였다. 이런 비천한 신분임에도 전생에 벽지불을 시봉한 공덕이 있어 부처님께서‘꼬삼비’도시에서 설법하신 112개의 경을 듣고, 수지하여 예류과를 증득하였음은 물론, 그 경들을 왕비와 시녀 500명에게 전달하여 그 여인들까지 예류과에 확립하게 함으로써 보살도를 실천하셨기에 부처님의 재세 시에‘청신녀 제자들의 모범이고 표준’이라는 칭찬을 받으신 님. 법의 창고지기인 아난다 존자를 포함한 500명의 아라한들이 빠알리 삼장 가운데 경장의 다섯 번째인『쿳다까 니까야』의 네 번째 경전으로 결집하여 26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승된 이 경전의 정수를‘각묵’스님께서 정리하여 격 주간으로 30여 회 법문한다. 

 

【경전】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한 가지 법을 버려라. 나는 그대들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보증하노라. 무엇이 한 가지 법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음이라는 한 가지 법을 버려라. 나는 그대들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보증하노라.”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이 경에서 이것을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음으로 미혹한 중생들은
 불행한 곳[惡處]으로 가나니
 통찰력 가진 자들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른 구경의 지혜로 버리노라.
 버리고 나서는 이 세상으로
 결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느니라.”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해설】

「분석 경」(상윳따 니까야 S12:2)에서 무명(無明, avijjā)은 “괴로움[苦]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무지”로 정의되고 있다.
여기서 ‘무지’(無智)라 함은 지혜 없음(aňňāna)을 뜻한다. 주석서는 이를 ‘어리석음’(癡, moha)과 같은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하(moha)는 ’어리둥절함, 혼란함, 명청함, 기절함, 미혹‘ 등의 뜻으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치(癡)로 옮겼다. 
초기 경에서는 주로 lobha(貪), dosa(嗔)와 함께 나타나며 우리에게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잘 알려진 용어이다.
어리석음은 모든 해로움의 근원이라고『아비담마』에서 설하고 있다. 그래서 해로운 마음부수에서 제일 먼저 언급이 되고 있고 모든 해로운 마음부수가 일어날 때에는 항상 함께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어리석음을 이렇게 분석한다. “어리석음의 특징은 마음의 어두운 상태이다. 혹은 지혜가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통찰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혹은 대상의 고유성질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바른 수행의 결여로 나타난다. 혹은 어두움으로 나타난다. 이치에 어긋나게 마음에 잡도리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모든 해로움의 뿌리라고 알아야 한다.”
삼계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는 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사성제에 대한 지혜(ňāna)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正見]로 정의되고 있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와 12연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를 무명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갈애에 조건 지어진 네 가지 취착 가운데 하나인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일 뿐이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네 가지 취착 가운데, 나머지 세 가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慾取],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이다.
나아가 「갈애 경」(앙굿따라 니까야 A10:62)에는 이 갈애는 무명에 조건 지어져 있다고 설하고 있어서 무명은 자아에 취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이다.
10가지 족쇄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면 유신견은 소멸된다. 그러나 무명은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해서 모두 다 소멸되지 않는다. 사성제를 관통해서 아라한이 되어야만 모두 없어진다.
따라서 ‘참나, 불성, 일심, 주인공, 여래장’이라는 용어를 운운 하면서 유사(類似) 자아관을 가진 자들은 무명이 다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직 유신견 혹은 취착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여 예류과도 증득하지 못한 자들이어서 범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생사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밝히는 12연기의 순관(유전문)은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하고,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을 밝히는 12연기의 역관(환멸문)은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한다.
나[我]라는 개념적 존재를 5온(蘊)·12처(處)·18계(界) 등의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 범부가 깨달음의 초보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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