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구나! 壇經은 後人들이 節略하게 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六祖대사의 크고 온전한 뜻을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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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구나! 壇經은 後人들이 節略하게 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六祖대사의 크고 온전한 뜻을 알 수가 없구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3.1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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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入者ᄂᆞᆫ 卽同善財라 於一念間애 圓滿功德ᄒᆞ야 與普賢等ᄒᆞ며 與諸佛等ᄒᆞ리니 이대 드닌 곧 善財와 ᄒᆞᆫ가지라 一念 ᄉᆞᅀᅵ예 功德이 圓滿ᄒᆞ야 普賢과 ᄀᆞᆮᄒᆞ며 諸佛와 ᄀᆞᆮᄒᆞ리니 (잘 드는[入] 이는 곧선재(善財)와 한가지여서 일념(一念) 사이에 공덕이 원만하여 보현(普賢)과 같으며, 제불과 같을 것이다.
善入者ᄂᆞᆫ 卽同善財라 於一念間애 圓滿功德ᄒᆞ야 與普賢等ᄒᆞ며 與諸佛等ᄒᆞ리니 이대 드닌 곧 善財와 ᄒᆞᆫ가지라 一念 ᄉᆞᅀᅵ예 功德이 圓滿ᄒᆞ야 普賢과 ᄀᆞᆮᄒᆞ며 諸佛와 ᄀᆞᆮᄒᆞ리니 (잘 드는[入] 이는 곧선재(善財)와 한가지여서 일념(一念) 사이에 공덕이 원만하여 보현(普賢)과 같으며, 제불과 같을 것이다.惜乎╷라 壇經이 爲後人의 節略이 太多ᄒᆞ야 不見六祖의 大全之旨ㄴ뎌 앗가올셔 壇經이 後人의 節略이 너무 하 六祖ㅅ 큰 오ᄋᆞᆫ ᄠᅳ들 보디 몯ᄒᆞᄂᆞᆫ뎌 (아깝구나! 壇經이 後人의 節略이 너무 많아서 六祖의 크고 온전한 뜻을 보지 못하는 구나.)

 

善入者ᄂᆞᆫ 卽同善財라 於一念間애 圓滿功德ᄒᆞ야 與普賢等ᄒᆞ며 與諸佛等ᄒᆞ리니 이대 드닌 곧 善財와 ᄒᆞᆫ가지라 一念 ᄉᆞᅀᅵ예 功德이 圓滿ᄒᆞ야 普賢과 ᄀᆞᆮᄒᆞ며 諸佛와 ᄀᆞᆮᄒᆞ리니 (잘 드는[入] 이는 곧선재(善財)와 한가지여서 일념(一念) 사이에 공덕이 원만하여 보현(普賢)과 같으며, 제불과 같을 것이다.

【解說】⑴ 善入者(잘 들어가는 者)는 앞에 ‘여기에’라는 장소가 생략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법계가 차별이 없음을 아는 이가 머무는 곳이며, 모든 법이 無生임을 아는 이가 머무는 곳이며,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이가 머무는 곳이며, ……등등인 곳이다.
⑵ 一念: 刹那는 법이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 단위의 시간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질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정신이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 단위의 시간은 그것보다 16~17배 빠르다고 한다. 또 1찰나는 ‘75분의 1초’라고 하니, 이것을 종합하면 1초에 念(마음)은 16×75(1200)에서 17×75(1275)번 정도 생멸 변화하는 것이다. 
“開口卽錯, 動念卽乖(입을 벌리는 순간 곧 잘못되고,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곧 어그러진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動念’이란, 業識이 轉識과 現識으로 구분되었지만 아직 相應하지 않은 제8식이, 轉識과 現識이 相應하여 智識을 일으키는 순간을 動念하는 순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순간은 『金剛經』에서 말하는 ‘過去心, 現在心, 未來心’ 중에서 現在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한, 功德을 圓滿하게 하는 기간은, 중생에서 부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기간이라는 3阿僧祗의 긴 기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1초의 ‘1200여 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動念의 순간이면 足하다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⑶ “圓滿功德”을 諺解는 “功德이 圓滿ᄒᆞ야 (공덕이 원만하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功德’이 술어의 뒤에 위치하므로 목적어이지 주어가 아닌 것을 모르고 단어만 나열하여 해석한 것이다. 
이 문장을 문법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圓滿’은 단어(詞)의 의미로 보아 형용사이며, 중국어에서는 이와 같이 의미가 형용사(자동사도 포함)로 보이는 것의 뒤에 목적어가 오면 意動용법(‘…와 같이 여기다’)이나 使動용법(…하게 시키다)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圓滿功德”은 “功德을 圓滿하게 시키다” 즉 “功德을 圓滿하게 하여”라고 해석해야 한다.
위를 종합하여 아래와 같이 수정한다. 

【飜譯】대체로 壇經은, 말(言)은 간결하고 뜻(義)은 풍부하며, 이치(理)는 명백하고 事는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惜乎╷라 壇經이 爲後人의 節略이 太多ᄒᆞ야 不見六祖의 大全之旨ㄴ뎌 
앗가올셔 壇經이 後人의 節略이 너무 하 六祖ㅅ 큰 오ᄋᆞᆫ ᄠᅳ들 보디 몯ᄒᆞᄂᆞᆫ뎌 (아깝구나! 壇經이 後人의 節略이 너무 많아서 六祖의 크고 온전한 뜻을 보지 못하는 구나.)

【解說】⑴ ‘爲’는 ‘… 때문에, …로 인하여’라는 뜻도 있다. ① 대체로 원인을 앞에 쓰고 결과를 뒤에 쓴다. [예문] 此心淸本無瑕 只爲貪求 被物遮 突出眼睛 全體露 山河大地是空華 『禪要 7』 (이 마음은 맑아 본디 흠이 없거늘, 단지 탐내고 구하였기 때문에 사물(경계)에 막혔도다. 눈을 돌출시켜 전체가 드러나면, 山河大地는 허공의 꽃이로다.) ② 때로는 원인이 뒤에 오기도 한다. [예문] 於者無字上 竟不曾有一餉間 省力成片 自決之後 鞠其病源 別無他故 只爲不在疑情上 做工夫 『禪要1』 (이 ‘無字’ 화두에서는, 결국 일찍이 한 순간도, 쉽사리 천차만별의 것을 쉽게 융합하지 못했는데(화두와 하나가 되지 못했는데), 스스로 해결한 후, 그 病源을 窮究해 보니, 따로 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만 疑情에서(의심하면서) 공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忽若悟得自心 本來成佛 究竟自在 如實安樂 種種妙用 亦不從外來 爲本自具足故 『書狀·答 陳少卿 季任』 (만약 自心은 본래 成佛인지라, 결국 自在하여, 如實하게 安樂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갖가지 미묘한 작용이, 또한 밖으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니, 본래 스스로 具足하였기 때문입니다.)
⑵ ‘旨  /     /    ’는 숟가락(匕)을 입(口 또는 甘)에 더하여 숟가락으로 음식물을 맛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本義는 ‘맛이 좋다’이다. “雖有嘉肴, 弗食, 不知其旨也.”『禮記·學記』 (비록 좋은 요리가 있으나, 먹지 않으면, 그 맛[이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본의로부터 맛이 좋은 음식물로 引伸되었고, 다시 意思(뜻)란 마치 맛있는 음식처럼 맛을 보면 볼수록 맛이 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에서 파생되어 ‘의사·의미·의도’라는 뜻이 되었고, 특별히 황제의 의도를 가리키는 뜻으로 황제의 조서·명령 따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예] 宗旨 / 意旨 / 聖旨 / 密旨 등
⑶ ‘志   *//   ’는『說文解字』에서 “从心之聲. 志者, 心之所之也.(心을 따르고 소리는 之이다. 志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라고 하여, 마음(心)이 의도하는 것으로, 가고자 목표하는 방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大憤志’라고 함은 ‘매우 분발하여 목표를 이루고자하는 마음’이다.
⑷ 그렇다면 ‘旨’와 ‘志’는 같은 뜻일까? 다른 뜻일까? 같다면 “不見六祖 大全之旨”를 “不見六祖 大全之志”라고 쓰거나 아래의 “斯余 志願 滿矣”을 “斯余 旨願 滿矣”라고 써도 괜찮을까? 또 만약 다르다면 ‘旨’와 ‘志’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흔히 志는 意志로 旨는 趣旨로 번역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깊게 탐구한 것은 없다. 이에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志’는 말하는 사람이 목표하는 바가 있어서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에 초점을 둔 것이며, ‘旨’는 ‘음식의 좋은 맛’에서 ‘글이나 말 등의 의사·의미·의도’라는 뜻으로 파생된 것이라면, [음식의 맛에 비유될 수 있는] 글이나 말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의미인 대상에 초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 그것들이 들어간 예문들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旨-예문] 特精微之旨는 具於辭說之表라 未易窺覩로다 『禪要』 (특별히 精微로운 뜻은 辭說(말)의 밖에 갖추어져 있어서, 쉽게 엿볼 수가 없는데,) 
然後에야 乃可蒲團靜坐하야 正念堅凝하리니 精窮向上之玄機하야 硏味西來之密旨하리라 『禪要』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실로 자리(蒲團)에 조용히 앉아, 正念이 굳게 엉키게 될 수 있으리니, [迷惑의 경계에서 직접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向上의 현묘한 진리를 精密하게 窮究하여, [달마가] 서쪽에서 온 비밀한 뜻을 자세히 맛보게 되리라.)
[志-예문] 喬祖 預西峰法席以來로 每抄集示徒法語之切於叅決者 名之曰禪要라하고 久欲與有志者로 共之러니 『禪要』 (喬祖가(제가) 西峰(高峰)스님의 法席에 참여한 以來로, [스님께서] 매번 제자들에게 보여주신(가르치신) 法語 중에서 參究하고 決擇하는데 懇切한 것을 베끼고 모아, 『禪要』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것을 참선에] 뜻을 둔 사람에게 주어 함께하고자 오랫동안 원하였습니다.)
奴家勸他斥去百慮 以志於學 俾夜作晝 『繡襦記·剔目勸學』 (제가 그에게 온갖 생각을 버리고 학문에 뜻을 두고, 밤을 낮을 삼아 계속하라고 권하였다.) 
具決定志 念念 如救頭燃 如此做將去 打未徹時 方始可說根鈍爾 『書狀·答 趙待制 道夫』 (결정적인(확고한) 뜻을 갖추어서, 생각 생각에(순간순간에), 마치 머리에 불붙은 것을 구원하는 것과 같이 할지니, [공부를] 이와 같이 하여도, 아직 깨닫지 못한 때라야, 바야흐로 비로소 근기가 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苟不發憤志精進 下一段死工夫 豈於木石之有異乎. 『禪要』 (만약 분한 마음을 내어 精進하여, 한 토막의 죽음에 이르는 공부를(죽음에 이르도록 [열심히] 공부) 하지 않으면, 어찌 木石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위를 해석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아깝구나! 壇經은 後人들이 節略하게 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六祖대사의 크고 온전한 뜻을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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