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신문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한국불교태고종 법환동 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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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신문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한국불교태고종 법환동 혜광사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1.03.24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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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섬 바라보는 80년 유서 깊은 법환동 향토 불교의 산실
서귀포 앞바다와 범섬을 바라보며 법환포구의 애환을 함께 한 혜광사 대웅전
서귀포 앞바다와 범섬을 바라보며 법환포구의 애환을 함께 한 혜광사 대웅전

 

혜광사(주지 지현 스님)는 올레길7코스를 따라가다가 법환포구 끝자락 법환녀마을해녀학교에서 우측으로 가다가 이어도로를 건너 하나로마트길로 들어가 루체클래식 입구에 자리한다. 주변의 현대식 건물에 둘러쌓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한때는 법환동의 불자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유서깊은 도량이다. 이제는 구글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주지스님이 홀로 도량을 지키며 신행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탓인가 싶다. 
법환포구는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목호 토벌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영장군이 숙영하였다는데서 유래된 ‘막숙(幕宿)’이 있고, 성을 쌓았던 ‘군자왓(軍城)’, 활쏘기를 연마했다던 ‘사장(射場)앞’, 병기를 만들었던 ‘병듸왓’, 범섬을 공격하기 위해 나무로 배를 엮어 범섬까지 연이었던 ‘배염줄이’, 군사를 조련시켰던 ‘오다리’ 등 마을 전체가 온통 군사기지로 승전(勝戰)을 도왔던 지명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법환동의 산세는, 진산인 한라산 남쪽자락으로 산기운이 뭉쳐서 고근산으로 이어지며, 양지모루 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외풍을 막아준다. 지맥을 따라 물줄기가 제섯동산으로부터 망팥까지 뻗어있어 사시사철 용천수가 시원스럽게 흐르며 다시 양지모루 내맥에서 흐르는 막숙물이 법환주민의 젖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범섬이 있어 세찬 물소리를 막아주며 마치 선비가 책상을 받아 앉은 모양세이다.

종루는 제주도 현무암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지만 정감있다.
종루는 제주도 현무암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지만 정감있다.

1374년 최영장군에게 쫓긴 목호의 잔당들이 범섬으로 후퇴하여 웅거하고 항거하므로 최영장군은 전함을 모아 섬을 포위하고 밧줄로 병사들을 상륙시켰다. 이에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관음보(觀音保)는 남쪽 벼랑으로 떨어져 죽고 석질리필사는 처자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남은 잔당들은 모두 참수하였다. 범섬에 웅거하던 목호의 잔당이 항거한지 불과 10여일 만에 평정되었으며, 범섬은 목호들의 최후까지 버티다 항복한 역사적인 격전장이 되었던 곳이다.
범섬을 바라보며 들어선 혜광사의 창건연대는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광사 사적비에 따르면, 이때 법화사 신도로 법환에 거주하던 이성근, 강원화 거사가 염불당을 개설 지역불자들이 함께 모여 불교신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여를 불자들끼리 모이고 있다가, 당시 법화사에 주석하던 오한일 스님이 1945년 2월 27일 부임하여 혜광도량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신도회를 발족하여 초대회장에 강호준 거사를 선임했다.
해방과 더불어 사찰의 구심력이 잡혀가면서 점차 사람들이 늘어나고 특히 아이들이 절에 자주 찾게 되자, 당시 임대하여 사용 중이던 도량을 1956년 강원규 거사가 강당신축을 위해 초가를 시주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57년 2월 1일 청소년교화를 위해 ‘수행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초대단장에 이근영 불자를 선임하였는데, 이 조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혜광사의 중추가 되었다.
날로 사세가 확장되자 1966년에 대웅전을 창건하고자 기성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회장에 현희권(玄熙權), 부회장에 현낙서(玄洛瑞), 총무에 이승춘(李昇春) 거사 등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1967년 5월 마침내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그 이후로도 1971년에 향적실을 개축하였고, 한원효 거사의 시주로 종각을 신축하였다. 이 종각은 제주도 현무암을 쌓아올려 매우 특이한 형태로 지어졌는데, 투박하면서도 단아한 조형미가 일품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창건주와 중건주, 역대 시주자들의 공덕비가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창건주와 중건주, 역대 시주자들의 공덕비가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1975년 6월 4일에는 현 주지인 지현(智賢) 스님이 부임하였다.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며 발전하던 중, 1977년 4월 8일에 사명을 혜광사로 개칭하고 당시까지 이화생, 염기생 명의로 되어 있던 토지를 시주받아, 1982년에 한현호 및 모든 신도의 정성을 담아 수행각(修行閣)을 개축하였다. 이후로도 1990년에 염팽운의 대지를 매입하여 도량을 확장하였고 1991년에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대웅전 중건에는 기성회장에 한승효, 부회장에 이광찬, 총무에 양재선, 재무에 양영일 등이 헌신 봉사하였고, 1993년 2월에 준공을 보았다. 2007년 2월에는 고광숙 불자가 지장보살을 시주하여 봉안하였다. 
앞마당에 우뚝 세워진 창건주 영화당(影化堂)대법사 공적비에 따르면, 한일(漢日) 스님은 1910년생으로 11세에 관음사 안도월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화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음사와 대흥사 및 고려사 등지에서 일대시교 수료하였고, 대흥사 및 일본 불광사에서 5하안거를 지냈다. 평소 서도를 즐겨하였고, 금강경에 달통하였는데, 1945년 2월 27일 혜광사에 주석하면서 포교에 전념하고, 특히 수행단을 만들어 많은 불자 키워냈으며, 혜광사의 중추로서 오늘의 있게 한 성과를 냈다. 스님은 1983년 3월 9일 7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단정한 대웅전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반긴다.
단정한 대웅전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반긴다.

 

중건 대화주 설해당(雪海堂) 대화상, 현 지주 지현 스님은 1975년 6월 4일 혜광사에 부임하였다. 1979년에 현재의 도량을 이화생과 염기생으로부터 시주를 받고 향적실을 개축하였고, 1990년 도량을 확장하여 1992년에 대웅전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태고종 사찰로 법환마을 주민들의 불교신행 중심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으나,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서귀포시가 크게 발전하자 도심포교의 거점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찬연한 역사는 즐비한 마당의 비석으로 영광을 기억하게 한다. 
80년 성상의 법환마을 불교역사의 창연한 이야기를 품은 혜광사는 아직도 범섬을 바라보며 종루의 울리던 법음의 향기가 은은하다. 누군가 진리의 법음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난다면, 법환포구의 역사와 함께 혜광사에서 부처님을 만나 ‘무상’의 세월을 음미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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