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과원 섬지기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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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과원 섬지기 20년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4.0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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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현
유 현

햇살의 따사로움을 느끼면서 아란야 과원의 동백, 매화, 백목련, 벚나무에서 낮밤 가리지 않고 사붓이 꽃을 피운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연두색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겨우내 쪼글쪼글해진 감귤나무 이파리도 줄기마다 물을 끌어올려 주름이 펴져 생기가 돈다. 
봄을 시샘하듯 찾아온 비바람에 백목련 꽃잎은 이별의 손수건 인양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고, 하얀 벚꽃은 꽃비가 되어 날린다. 열흘 남짓하게 살면서도 그리도 밝고 눈부시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말없이 떠나가는 꽃잎들. 
너희들은 죽어서도 다시 살아 봄이면 봄마다 여기에 찾아오겠지만 내 봄날은 한 조각 뜬 구름일세. 
동백꽃, 매화꽃의 꿀을 좋아하는 동박새의 곱고 청아한 울음소리가 낙화가 서러운 듯 구슬프게 들린다. 머지않아 필 감귤 꽃도 있고, 밤나무 꽃도 있고, 여름의 무화과, 가을의 노란 감과 귤이 있어서 이 놈들은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20년 전 따분한 도심의 아파트를 떠나 과원에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을 때 사방을 둘러보니 인적은 끊기고 모두 초목뿐이라 절해고도에 귀양살이를 자초한 게 아닌지 두려움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비록 몸은 과원에 머물지만 마음은 육지로 서울로 해외로 훨훨 날아다녔다. 한 번 쉬지 않고서도 며칠을 날 수 있고, 또 두 달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신천옹(信天翁, albatross)처럼 가장 높게 비상하여 세상사를 살펴보고 그리워 했다.
그러나 한 참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지구는 다섯 개의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제주 섬은 작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니 누구인들 섬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끝없는 자기 성찰을 위해서 스스로를 과원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로 결심하고 세상살이의 이해관계에 초연해지면서 동박새처럼 텃새로 변신해갔다.
제주 섬의 옛 모습은 유배지이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라 해서 광해군을 비롯한 추사 김정희, 충암 김정, 우암 송시열, 면암 최익현 등의 유림들이 유배된 곳이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인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고, 제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오늘의 제주는 선망의 섬, 낭만과 환상의 섬, 휴식과 힐링의 섬으로 변모하고 있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연 1,500여 만 명이 넘는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됐다. 제주에 살아서 부럽다는 말이 무성하다. 은퇴 후 제주의 자연 속에서 한거閑居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고 있다.  
아침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과원에는 초록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각자도생의 분주한 몸놀림을 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에겐 햇빛은 없지만 촛불을 밝혀서라도 마음의 한거를 잘 보호하여 지켜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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