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32) - 난징(南京) 서하산(棲霞山) 서하사(棲霞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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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32) - 난징(南京) 서하산(棲霞山) 서하사(棲霞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5.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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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서하산 제1경인‘채홍명경(彩虹明鏡)’
(사진 1) 서하산 제1경인‘채홍명경(彩虹明鏡)’

 

서하사가 있는 난징은 과거 건강(建康), 건업(建業), 금릉(金陵)이라 불렸다. 난징(南京)의 한자 뜻이 ‘남쪽의 서울’인 것처럼 여러 왕조의 수도였다. 맨 처음 전국시대 초나라의 도읍이었는데, 이 초나라는 장기판에 등장하는 한나라의 상대 국가인 바로 그 초나라이다. 장기는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인도 전통 군대인 코끼리부대(象), 기병대(馬), 전차대(車), 보병대(卒) 및 궁수대(包)로 구성되어 각자 머리를 써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놀이다. 이것이 유럽으로 들어가서 서양 체스가 되었고, 중국으로 전해져서 장기가 되었다. 현대 중국 장기에서는 궁성에 왕인 한(漢)과 초(楚) 대신 장(將)과 수(帥)로, 장과 수의 크기도 다른 말들과 차이가 없다. 말의 모양도 한국은 팔각인데 중국은 둥글고 일본은 사각형이며 진행 방법도 조금 다르다. 『고려사』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전래되었다고 한다. 중국 장기판은 우리나라 장기판과 달리 중앙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은 칸을 두어 한나라와 초나라가 강을 경계로 마주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비록 각 진영의 우두머리를 한(漢), 초(楚)로 하지는 않았지만 장기판 자체가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 간의 싸움터로 상정한 것은 한국, 중국 양국이 같다.  

(사진 2) 서하사 비로보전
(사진 2) 서하사 비로보전

 

귀족 출신에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수식어가 붙는 항우(項羽)는 타고난 힘과 무예를 자랑하는 용장인 반면 그의 상대인 유방(劉邦)은 평민 출신에 그다지 용맹하지도, 꾀가 있거나 학식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항우의 힘이 컸다. 하지만 이후 천하를 건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승리의 여신이 손을 들어준 이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항우가 아닌 평민 출신인 유방이었다. 그에게는 장량(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있었고, 유방은 그들을 적절하게 잘 썼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기판에서는 상수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한나라를, 하수나 손아래사람이 초나라를 쥔다.

(사진 3) 비로보전 비로자나불상
(사진 3) 비로보전 비로자나불상

 

이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 이야기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관심사가 되어, 초한지라는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사용하는 사자성어 중에는 이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적지 않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곤란한 지경을 가리키는 사면초가(四面楚歌)는 한나라 군대에 포위된 채 농성하는 초나라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밤마다 초나라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처럼 보람 없는 일을 한다는 뜻의 금의야행(錦衣夜行), 주량이 세다는 의미의 두주불사(斗酒不辭), 사마천의 『사기』에 전하는 월나라와 관련된 고사에서 나왔지만 유방 휘하의 뛰어난 장수였던 한신과 관련해 더 유명해진 토사구팽(兎死狗烹) 등이 『초한지』에서 비롯되었다. 남경은 이 초나라의 수도였고, 한나라가 망한 뒤 조조, 유비, 손권이 다투던 삼국시대에 손권은 난징을 자신의 도읍으로 정했다. 소설로 쓰인 『초한지』나 『삼국지』를 읽지 못했어도 중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흥미진진한 도시가 될 것이다. 

(사진 4) 오층석탑 뒤쪽에 있는 천불암
(사진 4) 오층석탑 뒤쪽에 있는 천불암

 

 청나라 말기인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일본과 서양 열강들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청 왕조를 타도한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이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1925년 그가 사망하자 당시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4년에 걸쳐 쯔진 산(紫金山)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인근에 있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과 황후의 무덤인 명효릉(明孝陵) 보다 1.5배 큰 규모이다. 오늘날 쑨원의 무덤인 이 중산릉은 매일 수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난징 제1의 명소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난징은 유서 깊은 도시로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억하기 싫은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나라 말기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서 패배해 홍콩을 할양, 즉 자기 나라 영토를 다른 나라에게 넘겨주는 치욕적인 난징조약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때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민간인을 포함한 30만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현장이기도 하다. 중국은 관련 자료를 발굴해 추모관과 위안소유적진열관 등을 만들었고, 2015년에는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동병상련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독립군들이 많이 다녔던 황포군관학교, 약산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5) 천불암에서 가장 큰 무량수불감
(사진 5) 천불암에서 가장 큰 무량수불감

 

이처럼 유서 깊은 고도의 북쪽에 서하사에 자리하고 있다. 명나라 이래 ‘춘우수 추서하(春牛首 秋棲霞)’로 불리며 금릉사십팔경 중 하나로 특히 가을 단풍으로 유명해 청나라 건륭제는 다섯 차례나 서하사가 있는 산을 올랐다고 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명경호는 바로 이 건륭제 때 건설되었다. 호수에 비친 단풍의 아름다움을 ‘채홍명경(彩虹明鏡)(사진 1)’이라 하며 서하산에서 제일 뛰어난 경치로 꼽는다. 서하사의 주불전은 비로보전(사진 2)이다. 웅장한 건물 중앙에 화려한 연꽃 대좌 위에 앉은 보관을 쓴 비로자나불(사진 3)을 모셨다. 우리나라 절과는 사뭇 다른 화려한 불전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지만 신심 깊은 불자들에게는 모두 같은 부처님일 따름이다.  
기단부에 불전도가 새겨진 팔각오층석탑의 동쪽, 산에 있는 바위를 뚫어 여러 개의 감을 만든 천불암(사진 4)이 있다. 1924년에 새겨진 글에는 남제 영평2년(484)에 처음 파기 시작하여 명대까지 만들어졌고, 254개 불감에 553존의 불상이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오늘날 안내문에는 총 294개의 감에 515존의 불상이 있다고 한다. 오랜 기간 동안의 풍화와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많이 파손되었지만 강남에서 운강석굴이나 용문석굴에 비견되는 불교 유적이다.

(사진 6) 천불암 중 이불병좌감
(사진 6) 천불암 중 이불병좌감

 

이 중에는 고구려 출신 승려인 승랑(僧朗)스님이 주지로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생각하면 감개가 남다를 것이다. 가장 큰 불상은 천불암 중심에 자리한 높이 11미터의 아미타불(사진 5)이다. 승랑을 서하사로 초청한 전임 주지인 법도(法度)가 서하정사라 이름 짓고, 무량수경을 강설했다고 하니, 천불암의 중심 불상이 아미타불인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한쪽에 있는 불감에는 선정인과 통인을 취하고 있는 두 불상(사진 6)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남북조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이불병좌상이다.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고 분명한 옷주름에 조금 마르고 야윈 신체 모습은 용문석굴의 불상을 연상케 한다. 일부 아기자기한 감실에 모셔진 불상들에서는 경주 남산의 작은 감실에 모셔진 불상들이 겹치기도 한다. 
남경에 가면 서하사에 가서 승랑스님의 흔적을 찾아보고, 사리탑 천불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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