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19) - 위빠사나를 성취하기 위한 두 가지의 길⑴
상태바
위빠사나 길라잡이 (19) - 위빠사나를 성취하기 위한 두 가지의 길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2.07 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현
유현

12연기의 철학적·교리적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성제의 얼개를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겨나는 순서로서의 연기[順觀]는 고(苦, dukkha)의 진리와 고의 일어남의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고, 멸하는 순서로서의 연기[逆觀]는 고의 멸滅과 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진리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의 핵심은 ‘연기, 무아’라 할 수 있고, 이것을 진리체계로 구성한 것이 사성제四聖諦이고, 팔정도(the Noble Eightfold Path)는 이것을 수행체계로 구성한 것입니다. 팔정도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자 최후 설법입니다. 
계정혜 삼학三學이란 팔정도를 간추린 것으로 계(sīla, 戒)와 삼매(samādhi, 定)와 통찰지(paňňā, 慧)를 뜻합니다. 모든 불교의 수행은 계정혜 삼학으로 통합되므로 불교 수행의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이 삼학 가운데 계학은 율장에서, 정학은 경장에서, 혜학은 논장에서 주로 설해진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계는 네 가지 청정한 계다. 삼매는 위빠사나의 기초인 여덟 가지 증득(색계4선+무색계4처)이다. 통찰지는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 지혜다.”라고 설명합니다.
혜학慧學이란 무슨 뜻입니까? 중국에 혜慧로 옮겨진 원어는 빤냐(paňňā)인데 이것은 반야(般若)로 음역되었습니다. 『청정도론』에는 “꿰뚫고 통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가지는 것(통찰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혜학의 핵심은 사성제를 통찰하는 것인데, 이것은 팔정도의 바른 견해의 내용입니다.
정학定學이란 또 무슨 뜻입니까?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에서 마음이 한 끝(대상)에 집중됨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계학戒學의 핵심은 단속입니다. 마치 냉장고의 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냉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는 산해진미가 썩어 버리듯 자기 자신의 여섯 가지 감각대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설령 내 안에 삼매와 지혜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다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옛 선사께서 “계(戒)의 그릇이 견고해야 정(定)의 물이 맑게 고이고 정(定)의 물이 청정해야 지혜의 달이 둥글게 비친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금구명언은 “계정혜 삼학은 솥발[鼎足]같아서 발하나만 짧아도 솥이 바로 설 수 없다.”는 말인데, 삼학은 수행의 종합 세트(set)와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조석으로 독경하고 사경하는   「반야심경」의 반야(般若, paňňā)는 계정혜 삼학 가운데 하나인 혜(慧, Prajňā, 프라즈냐)인데, 계와 정은 혜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즉 ‘프라즈냐 파라미타’는 ‘지혜를 완성해 간다.’는 의미와 ‘지혜의 완성’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계와 정이 한 몸뚱이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반야의 혜慧가 완성되고 또 완성으로의 길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반야의 완성은 해탈이고 열반이며, 팔정도의 완성입니다. 부처님께서 “나는 알아야 할 바(고성제)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바(집성제)를 버렸다. 그래서 나는 붓다,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 는 풀이말인데, 이 두 가지 수행법은 중국에서 심도 깊게 이해되어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로 정착되고,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手)로 계승되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전법 제자요,『증도가』의 저자로 유명한 영가현각 스님이 쓴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에서도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은 제4장의 사마타[奢摩陀]이고, 제5장의 비발사나[毘鉢舍那]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 경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마타 수행을 바른 삼매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바른 삼매와 관련된 수행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나 통찰지와  관련된 수행이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수행 체계로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진리를 직접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그 반면에 고요함(samatha)을 닦는 것은 사마디(samādhi)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다른 교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불교의 고유 영역이 아닙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불교 수행의 두 가지 방법이나, 사마타는 개념[빤냣띠, paňňatti]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고 표상(nimitta)에 대한 집중이나, 위빠사나는 법[法, dhamma]을 대상으로 하는 법에 대한 통찰이므로 그 성격이 다릅니다.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명상센터에서는 호흡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놓고서 코의 들숨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마타 수행이고, 배의 풍대를 알아차리는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대상의 모양과 명칭을 알아차리면 전자이고,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후자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고 설명하는 것은, 아직 도와 과를 체득하지 못하였지만 열반을 실현하고 도와 과를 체득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세간적인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관한 것입니다. 출세간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여기에서 언급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둘 다를 동시에 닦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생사윤회의 근본인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한 하나가 된 상태로, 밝고 맑은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드러나지 않고 잠복되어 있을 뿐이고, 사마타에서 나오면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초기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lmutta)이라고 합니다(A5:149).
번뇌는 위빠사나의 지혜로써만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매의 도움 없이 통찰지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마타는 위빠사나를 성취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