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에 담긴 선취여행(17) - “우리의 마음과 현실이 바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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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에 담긴 선취여행(17) - “우리의 마음과 현실이 바로 진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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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 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 버리고
지금의 나를 바르게 보아야
곽경립(시인, 수필가)
곽경립(시인, 수필가)

우리는 생활에 쫓기며 정신없이 살다가 언뜻 스치는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한없는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삶의 진실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과연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갈 만한 곳인가, 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 등등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마음을 향하여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一切唯心造).’라고 불가佛家에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무리 찾아도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있음과 없음에 매달려 속을 태웁니다. 그리고 겨우 찾았다 싶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곧 아집이고 집착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으로 인하여 본래의 나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마음에 매달려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자료에 나타난 초기 불교의 교설을 보면 석존은 방문한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태로 불법佛法을 설하고 있습니다(對機說法). 각양각색의 물음에 대하여 비유적인 예를 들어가며 설하시는 석존의 말씀 대부분은 ‘마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음’ 본래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여 ‘마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마음’을 소중히 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현실을 벗어나거나 공허한 논쟁거리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또 마음의 있고 없음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마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다양한 현실에 대응하면서도 그 현실에 끌려가지 않고 현실에 대처하는 ‘마음’을 중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과 현실이 바로 진리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생각과 감정으로 부질없는 잡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으로, 생각이 깊어질수록 감정의 골도 깊어갑니다. 이처럼 생각과 감정은 서로 경쟁하면서 돌고 도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이 생각을 부추기기도 하고, 생각이 감정을 부추기기도 하면서 우리의 몸에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분별심으로, 생각을 일으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말하자면 마음은 본래 청정(自性淸淨)한데 생각이 분별심을 일으켜(自性分別) 감정이 생기고, 감정이 다시 생각을 일으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잡다한 생각을 끊어내고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과거로부터 옵니다. 과거에 내가 겪었던 경험이 지식이 되어 현재의 생각을 낳게 합니다. 몸은 현재에 있고, 생각은 과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은 기억, 체험, 지식에 대한 반응일 뿐,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낡은 생각으로는 지금의 나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나, 현재의 나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현재의 열반(現法涅槃)’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화엄종의 5조祖 종밀宗密은『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에서 “심성을 떠나서(心性上外) 진리란 없다(更無一法).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이란 다만 심성을 닦는 것(心性上外, 更無一法, 故但任性卽爲修世.)”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諸法實相)을 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身心脫落), 지금의 나를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잠시 쉬어가며 시 한 편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상건常建(708?~765)은 약관의 나이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살이가 여의치 못하여 일찍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의 명산을 유람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만년에는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서쪽에 있는 악저鄂渚에 은거하여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한가롭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시는 뜻이 심원하고 독특하여 좋은 구절이 많으며, 시풍은 왕유와 맹호연처럼 산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겨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 시의 제목인 파산사破山寺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 우산虞山에 있는 흥복사興福寺를 말하며, 후선원後禪院은 절 뒤편에 있는 선방을 말합니다. 시인은 새벽 맑은 공기(淸), 밝은 햇살(初日), 숲으로 이어지는 그윽한 길(幽), 깊숙한 곳에 자리한(深) 선원의 고요함(寂) 등 산사山寺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인 산광열조성山光悅鳥性, 담영공인심潭影空人心에 있습니다. 붓다가 초기 교설인『숫타니파타』467에서 “깨달은 자는 생사의 궁극을 알고, 마치 맑고 찬 호수와 같이 고요함으로 돌아간다.”라고 설하였다면, 시인의 마음 역시 산 기운이 맑고 그윽하니 새들이 저절로 즐거워하듯 마음을 비워 잡념을 씻어내니 연못에 비추는 그림자처럼 정신이 맑아지고 흔들리지 않아 온갖 잡념이 모두 사라져 고요하다는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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