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고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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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고산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05.02.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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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닦아라, 세가지 배움의 길”



고산스님은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194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56년 비구계를 수지하고 70년까지 8안거를 성만했다. 61년 직지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 대강백 고봉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청암사·범어사 등의 강주로 활동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은 현대 한국불교의 손꼽히는 강백이다. 또한 한국불교의 율맥을 계승한 동산·석암스님으로부터 율맥을 전수받은 율사이기도 하다. 부천 석왕사, 혜원정사, 통영 연화사 등을 창건, 지역포교의 중심으로 성장시키는 등 포교와 전법에도 모범을 보였다. 75년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 주지와 은해사, 쌍계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94년 호계원의 초대·2대원장 선임, 98년 말부터 제29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기도해 종무행정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조실로 주석중이다. 스님의 법문을 지면에 옮겨 싣는다.



불교의 절대적이며 근본되는 교리의 중심에 삼학(三學)이 있습니다. 계(戒)·정(定)·혜(慧) 이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라면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배움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양식있는 인간이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자라 할 것이다.” 이 말처럼 불교도가 지향하는 궁극의 도달점은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인바, 위에서 푸쉬킨이 말한 ‘양식있는 사람’과 상통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깨닫는 것, 즉 ‘성도(成道)’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바르게 보고 참되게 알며, 또한 그것을 자기 체계화하여 자율적인 인격을 완성함을 일컫는다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새벽 동녘하늘의 샛별을 보고 문득 성도 하셨습니다. 동쪽 하늘의 샛별은 부처님 이전에도 떴을 것이며 앞으로 몇 만 겁을 더 살아도 변함 없이 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변함없고 항상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을 샛별이 석가세존의 눈에는 성도의 길잡이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의 눈에도 샛별은 보이고 우리들에게도 무한한 세월과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껏 어둠속에서 샛별을 등지고 무명을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뼈를 저미는 마음가짐으로 불교의 근본사상인 계·정·혜 삼학을 바로 알아 성불을 향한 새로운 발심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습니다. 정신을 청정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 언동에 특별히 유념하여야 할 것이요,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로서 일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계입니다.

정이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의식작용으로서 흔히 선정(禪定)이라 표현하며, 마음을 안정시켜 하나의 사고대상으로 전심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혜는 계와 정으로 대표되는 건강하고 균형 있는 신체작용과 정신을 통일할 때 얻어지는 식견이자, 지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에 충실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양식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요, 그것은 곧 불교인의 궁극의 목표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그 첫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의 조건을 ‘신(信)’속에 포함하여 그 본래의 뜻을 살리고 있습니다.

계는 산만한 마음을 방지하여 산란하지 않게 되는데 그 뜻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는 신을 존중하고 숭상하여 믿고 의지하는 유신론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닫고, 그것이 곧 우주 본연의 이치요, 지혜임을 알아, 최고의 지혜를 증득하고 완성함에 그 목적을 두는 철저한 자력신앙의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하였으니 일체만유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청정하고 바르게 갈고 닦아 본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에게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고 하는 육근(六根)이 있어, 온갖 번뇌와 망상과 시시비비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공연한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어찌 해야 하겟습니까? 이 육근이 요구하고 가고자 하는 바,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본연의 길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어찌 육근의 시종이 되고서 성불의 대도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즉, 계(戒)는 이 육근에서 비롯된 온갖 부정한 욕망과 번뇌망상, 그릇된 분별심을 엄히 단속하는 채찍과도 같은 것으로, 가히 불심을 보호하는 울타리요, 담장이라 할 것입니다. 계를 지킴으로서 안정을 얻게 되며, 번뇌와 망상이 구름 걷히듯 소멸하게 됩니다. 정(定)은 경거와 요동이 없는 평온 정착한 마음상태를 가리키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에서 잡된 물결이 고요히 잠들고, 식랑(識浪)의 거친 파도가 침식되어버린 상태야말로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정담(靜湛)한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정(定)은 참된 사고와 참구의 기본입니다. 산란한 마음에서 어찌 바른 사고 작용과 몰두가 행하여 질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과학과 문학적 유산이 곧 정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혜(慧)는 슬기로움을 의미합니다. 계를 준수하여 고요함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밝고 자유로운 사유를 행하고, 그로부터 지혜, 즉 참된 슬기가 생겨나는 것이며, 비로소 부처님의 절대 자유하고 평등 무애한 세계로 나아가는 바른 방편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대비바사론의 삼장(三藏)과 삼학(三學)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율(律)은 계학(戒學)에, 경(經)은 정학(定學)에, 론(論)은 혜학(慧學)에 대비된다 할 것입니다.

팔종강요상권을 보면, 삼장은 능전(能詮)의 가르침이며, 삼학은 소전(所詮)의 의(義)라고 하였습니다. 경·율·론 삼장은 주관적인 교리라 할 수 있으며, 계·정·혜 삼학은 객관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삼장의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삼학의 깊은 뜻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가지 경과 만가지 이론에 모르는바 없이 모조리 통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두발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실천력과 치열한 수행에의 정진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많은 지식과 앎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마치 가을이 저물어 가는 산 속에 떨어져 내리는 낙엽과 같은 것입니다.

경과 율을 모른다 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고 수행의 실천력이 바르다면 그것이 성불작조(成佛作朝)의 가장 확실한 씨앗이 됨을 밝히고자 함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건대, 계는 악(惡)이 새어들 틈을 틀어막는데 필요한 처방이며, 정은 지(止)와 적(寂)을 위한 것이라면, 혜는 지(智)와 관(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 일이건 그 근본되는 바 기초를 바르고 튼튼하게 닦음이 우선이듯이 불교수행의 근본은 곧 삼학인 것이니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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