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고려속의 제주 ③-몽골지배기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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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고려속의 제주 ③-몽골지배기와 제주
  • 강승오 기자
  • 승인 2005.02.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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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세월 몽골의 정치적 영향하에

제주 동북아중심에 위치…활발한 교류와 잦은 침탈

몽골지배로 목축산업 발달·경제력 상승·인구유입

원지배기말 수탈심해 공민왕때 반원정책 펼쳐



   
 
   
 
고려후기에 들어와 고려는 몽골의 참략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30여년 간 끈질기게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1270년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다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몽골의 심한 내정간섭으로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위축되는 80여년 간의 원 간섭기가 시작됐다.

탐라와 몽골의 접촉은 고려 원종 8년(1267) 정월에 처음 이뤄졌다. 중국문헌인 ‘원사(元史)’ 에 ‘백제가 양호를 보내 알현하자 아름다운 비단옷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양호가 원종대의 탐라의 성주라는 사실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 있다.

“탐라가 남송과 일본의 요충이기에 주목했다”는 당시 몽골황제 세조(쿠빌라이)가 탐라의 성주입조를 고려에 명하고 이에따라 알현이 이뤄졌다. 일본, 남송에 대한 회유와 함께 세조는 탐라의 성주를 불러들어 주변정세를 미리 파악해 두고자 하는 뜻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의 삼별초 대몽항쟁이 막을 내리게 되자 몽골은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라는 관부를 설치했다. 탐라를 일본과 남송정벌의 전초·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직할령으로 삼은 몽골은 한편으로는 목마장을 설치해 몽골 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 하나로 키우는 등 제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두 차례의 일본 정벌이 실패하고, 이에 집착하던 황제 쿠빌라이가 충렬왕 20년(1294)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80여년 간 제주는 고려와 몽골을 수 차례 오가며 귀속됐다. 제주가 양국에 이중 귀속되는 미증유의 처지에 빠져든 가운데, 탐라 국립목장에서 산출되는 말·소·쇠고기·버터류 등의 방물을 거둬가는 몽골의 경영은 계속됐다. 이에 따라 점차적으로 제주사회의 주도권은 공민왕대(1352∼1374년)에 이르러서는 ‘하치’라고 불린 목호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탐라 국립목장에 배속돼 말과 소 등의 사육을 관할하던 몽골족이었던 이들 ‘하치’들은 100여년 간 제주가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는 가운데 제주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몽골이 제주에 설치한 국립목장은 역사상 단일국가로서 최대의 판도를 형성한 몽골의 세계정복사업 추진에 필요한 전마(戰馬)를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됐다.

제주에서의 목축산업이 성공을 거두자 몽골은 충렬왕 26년(1300) 무렵에는 그 규모를 더욱 확대했으며 ‘하치’를 더욱 많이 파견하게 되고, 이들이 제주의 목호세력을 키워가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 이전의 제주 마을은 해안지대를 끼고 형성됐다. 농경만으로는 생활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반농반어(半農半漁) 형태의 생업활동을 통해 먹거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주의 생활형태는 14세기 초 무렵 탐라목장이 몽골의 국립목장이 될만큼 번성하면서 중산간지대에도 마을이 형성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중산간 마을의 형성은 이곳에서 방목되던 우마의 사육을 위한 몽골족의 입도(入道)에 의한 것으로 몽골이 제주에 대해 어떠한 지배정책을 전개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몽골의 직할령화가 이뤄졌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대해서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을 통해 이뤄졌으나 제주는 몽골이 직접 사람을 보내 지배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의 김일우 박사는 “제주에 대한 몽골의 직접 지배는 제주가 그들이 필요로 하던 전마(戰馬)를 생산하고, 일본과 남송을 정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활용성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제주에 들어온 상당수의 몽골족과 제주 여인과의 혼인 등을 통해 늘어난 인구가 주 생활터전인 제주 중산간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또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성년이 되면 하급 ‘하치’ 또는 관리직으로 국립목장 운영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고려는 원의 직할령이던 제주가 환속되는 충렬왕 20년(1294)부터 지배력 강화의 조처를 취해 ‘탐라’라는 칭호를 버리고 ‘제주’라는 명칭을 복구시키며 제주목으로 개편한다.

목(牧)은 경(京)과 도호부(都護府)의 격을 지닌 행정단위로 최상의 독자적·개별적 행정단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제주목으로 개편된 이후부터는 오늘날의 도와 같은 위상을 지닌 고려의 최상급 지방행정단위가 된 것이다.



제주는 몽골의 직할령 기간에 몽골족의 유입과 제주인과의 결혼 등을 통한 인구의 유입과 증가로 규모가 확대되고, 당시 제주지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 중요성으로 인해 행정단위가 현재와 비슷한 상위급이었다.

원의 직할령이 되기 이전이기에도 탐라는 한반도로부터 바다로 멀리 떨어진 규모가 큰 섬인 점, 그리고 자율적 정치체였던 탐라국이 오랫동안 유지됐기에 형성된 역사적 경험이 깃들인 곳 등의 특수성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항상 독자적·개별적 행정단위로 편제·운영된 편이었다.

고려는 충렬왕 26년에 이르러 탐라지역의 행정단위를 제주목(濟州牧)과 15개 현(縣)으로 분화·확대 개편했다. 이 개편은 이전에 비해 규모가 커진 탐라사회에 대한 경제적 수취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행해진 조처였다.

김일우 박사는 “이 시기 이후 원의 재직할령화가 이뤄지는 데 이는 몽골의 탐라경영 강화뿐만 아니라 행정단위 개편을 통해 탐라 말 등을 거두려는 고려의 의도를 무산시키는 한편, 충렬왕을 압박해 더욱 저자세를 취하게 하려는 목적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탐라는 고려에 편입된 이후 몽골 지배기를 거치면서 외형적인 규모는 늘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민초들의 생활을 원과 고려의 수탈로 눈에 띄는 경제적 풍요는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 지배기 말에는 그 수탈 정도가 점차 심해지고 공민왕대에 이르러 반원정책이 전개되면서 이에 반기를 든 지역 목호를 중심으로 한 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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